미국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AFL-CIO)는 64개 산별조직과 1,300백만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미국 내 유일한 전국 단위 중앙조직이다.

■실리적 조합주의와 반공주의의 역사

정치적 무관심과 실리적 조합주의로 대표되어온 미국 노동운동의 성격은 1886년 숙련공들의 직업별노동조합인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의 결성을 계기로 정착됐다. AFL은 실리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을 중심으로 "노조는 정치·사회적 활동보다는 경제적인 실리를 달성하기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에 따라 정치활동은 부인되고 단체교섭을 통한 노동조건의 유지개선에 초점을 맞춰왔다.

1938년에는 AFL의 이같은 이념에 반발한 일군의 산별노조들이 조직을 탈퇴, 산별조직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를 건설했으나 55년 다시 이 둘은 다시 AFL-CIO로 통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CIO는 노동자의 지위향상이 임금인상만이 아니라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노동세력이 사회비판세력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반공주의 노동운동을 특징지었던 47년 태프트-하틀리법은 이 AFL과 CIO의 이념적 대립을 AFL로 흡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태프트-하틀리법은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긴급시 쟁의중지와 냉각기간 설정 등 쟁의조정제도 △공산당과 그동조자 간부 배제 △파업투표 의무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제9조 h항에는 노조간부에 대해 '자신은 공산당원이 아니다는 취지의 선서진술서'(반공선서증)을 전국노동위원회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의 발표는 당시 미국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CIO조직을 흔들었다. 결국 CIO가 이 법에 반발하는 11개 노조(조합원 90만명)를 50년에 제명하면서까지 이 법을 수용하면서 AFL과 CIO의 노선상 대립은 해소됐으며 이는 두단체 통합의 배경이 됐다.
통합 규약 대부분에는 반공조항들이 삽입돼 사회주의자들의 노조 내 진입이 철저히 배제됐다. 결국 AFL-CIO의 이같은 성향은 조직을 AFL 계열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됐으며 이같은 AFL 경향에 반발한 CIO의 일부 노조들이 70년대 초 조직을 탈퇴하기도 했다.

태프트-하틀리법의 반공조항은 59년의 랜드럼-그리핀법의 제정으로 삭제됐으나 AFL-CIO의 규약 내 반공조항은 그대로 유지됐으며 조직 내 민주적·사회주의적 활동에 탄압을 가하는데 이용돼 왔다. 또한 AFL-CIO는 국자유노련(ICFTU)을 중심으로 반공주의적이고 노사협조주의적 노동운동을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AFL-CIO의 흐름은 95년 존 스위니(John J. Sweeney)의 등장으로 일대 변화를 겪게된다.

■존 스위니의 등장과 AFL-CIO의 개혁

79년 조지 미니(George Meany) 초대의장으로부터 AFL-CIO의장직을 인계받아 2대의장에 재임해온 레인 커클랜드(Lane Kirkland)는 95년 심각한 위기에 부딪혔다. 그동안 AFL-CIO의 운영방식에 대해 축적돼 왔던 조합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54년 37.4%로 정점을 기록했던 조직률은 60년 31%, 80년 23%, 90년 16%, 94년 15.5%로 계속 저하됐고, 95년에는 14.9%로 전후 최저를 기록했다. 또한 레이거노믹스 이후 신자유주의적 노조공격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규제 완화·민영화'정책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은 증가했고 생활수준도 하락했다. 임금삭감이 이어졌고 사회보장제도도 개악됐으나 AFL-CIO는 이미 대처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참가인원 1,000명 이상의 쟁의건수도 계속 하락해 75년 235건, 80년 187건, 85년 54건, 90년 44건, 93년 35건으로 계속 감소했고, 95년에는 32건으로 조직률 저하와 마찬가지로 전후 최저를 기록했다.

커틀랜드 노선에 대한 비판은 95년 2월 집행위원회에서 표면화됐으며 5월 집행위원회에서는 CIO계열의 주요단위 산별노조 위원장들이 커틀랜드 의장의 재선에 반대해 독자후보를 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AFL-CIO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결국 커클랜드 의장에 대한 사퇴 압력으로 이어졌으며 커틀랜드 의장은 사퇴하면서도 자신의 후계자에게 의장직 계승을 요구했다. 그러나 산별노조 위원장들은 선거강행을 주장해 95년 10월 AFL-CIO 사상 최초로 의장선거가 치뤄지게 된다. 결국 선거에서 존 스위니(John Sweeney)후보가 730만표를 획득 커틀랜드 의장의 후계자인 토마스 도나휴를 160만표차이로 이겨 의장에 당선되면서 AFL-CIO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존 스위니 의장은 국제서비스연맹(SEIU)을 16년동안 이끌면서 62만5,000명이던 조직을 110만명으로 확대시킨 인물로 주목을 받아왔으며 80년부터 AFL-CIO 부위원장으로 조직내 비판세력을 이끌어 왔다.

스위니 의장은 스스로를 "미국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목소리(New Voice)"라고 부르며 상근 근무자들에게 "문서를 버리고 밖으로 나서자"고 호소했다. 또한 지금까지 AFL-CIO가 방기해온 중앙조직으로서의 본래의 활동에 힘쓰겠다며 미국 내 투쟁적 노조의 상징인 전미국탄광노동조합의 리차드 트럼카(Richard L. Trumka)를 재정담당서기(조직내 2인자)에, 사상 최초로 여성·유색인종의 대표인 린다 차베즈 톰프슨(Linda Chavez Thompson)을 상임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조직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미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최우선 과제로서 내걸고 96년 2,000만달러, 97년 3,000만 달러 등 막대한 자금을 조직확대에 배당했다. 형식적이던 조직화 연구소를 연맹의 중심에 끌어올렸으며 전임의장시절에 상상도할 수 없었던 여성, 유색인종,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했다. 또한 파업횟수와 참가자도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전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국제적으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영향을 받으며 제3세계에 실리적 조합주의와 반공주의를 전파했던 해외연구소들도 대부분 해체했다. 뿐만아니라 스위니의 '새로운 목소리'파는 조직 규약의 모든 반공주의와 미국공산당에 대한 부정적 언급일체를 삭제했다. AFL-CIO의 임무도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정의로 재정의됐다.

■오랜 관행에의 안주와 개혁의 과제

그러나 스위니의 목소리가 일부 산하연맹들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하더라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조직 내에 안주하려는 세력의 도전은 여전히 거세다. 중앙의 독려와는 달리 직접 조직화를 수행해야할 산하조직들의 움직임은 활발하지 못한 것도 스위니의 부담이 되고 있다. 더욱이 95년 스위니에 맞섰던 보수파들도 복귀의 희망을 품고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뿐만아니라 AFL-CIO의 규약에서 반공주의가 삭제됐다고는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앨 고어 후보를 지지한 것과 같이 정치세력화에서도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지난 99년 시애틀의 세계화 반대시위에 나타났던 AFL-CIO의 노동자 부대에 시위대들이 흥분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중심 미국에서 들려오는 노동운동 개혁의 목소리에 많은 관심이 몰려있다. AFL-CIO의 새로운 흐름이 미국노동운동의 오랜 관행을 넘어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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