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극단 기다림

12월12일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기간에 김용균 추모문화제를 개최하려고 2주 전에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야외공연장 대관신청을 했다. 마로니에공원 야외공연장은 서울 종로구청 소유다. 김용균 추모문화제에서 한국작가회의 시인들은 고 김용균 노동자 관련 시를 낭독하고, 노래극단 기다림은 대사를 낭독하고 노래 공연을 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청 야외공연장 대관 심의회의가 있었다. 대관 심의에서 부결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결된 이유는 추모문화제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사랑노래 같은 것만 해야 합니까? 노동자를 위해서 노래하면 안 되나요? 그럼 안중근 뮤지컬이나 이순신 뮤지컬도 정치적인 것입니까?” 나는 이렇게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서울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담당자는 “지금까지 대중음악 같은 순수예술공연에만 대관했으며 안중근이나 이순신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인물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심의위원들이 결정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중음악 같은 순수예술? 의아했다.

순수예술의 어원은 고전예술과 동일하게 사용되는데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으며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이라고 한다. 엄격히 구분하자면 파인아트(fine art)라고 하는데 예술의 기능성이 배제된 비실용적 예술로서 순수 미적인 부분을 표현한 예술을 칭한다.

그래서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 반대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대중예술은 기업에 의해서 창조되고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는데서 예술성과 비영리를 추구하는 순수예술과는 대척점에 있다.

순수예술은 18세기 중세시대 종교에 복무하는 예술에서 독립해서 예술인들이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서 발생됐다. 엘리트주의·귀족주의 예술이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대중예술과 차별화하면서 순수예술의 고귀함과 신비함을 강조하고 대중예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계급·계층의 주관적 입장에서 탄생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종로구청 심의위원들이 노동자를 표현하는 예술은 순수예술이 아니라서 불허한다는 논리도 역시 계급·계층의 입장에서 예술을 구분하는 그들만의 셈법인 것이다. 순수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면 상대가 불순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이라는 용어도 그렇다. 정치인이 정치를 하면 순수하고 노동자들이 정치를 얘기하면 순수하지 않은 것일까? 투표 자체가 정치행위고 모든 국민은 정치행위를 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의 권리요구를 예술로 표현한다고 해서 순수하지 않다고 폄하해서도 안 된다. 예술가들이 최소한 영리를 위해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낭독노래극 기다림은 2019년 8월 청년 김용균과 같은 죽음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메세지를 담아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그 이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은 용균이가 없는 김용균법으로 전락해 버렸고 노동자의 죽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김용균 죽음 이후 상황을 담은 낭독노래극 기다림2를 제작하게 됐고 김용균 노동자 2주기에 발표하려고 한다.

서울 종로구청이 김용균 노동자 추모에 관한 노래가 순수하지 못하는 이유로 대관을 막는다고 해도 우리는 대학로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

지난해 1주기 때는 광화문광장에서 칼바람을 맞고 기다림1을 공연했다. 마로니에 야외공연장의 멋진 천장이 없어도 상관없다. 멋진 음향시설이 없어도 된다. 우리는 대학로 길바닥에서 시를 통해서, 노래를 통해서 육성으로 외칠 것이다. 청년들에게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달라고. 죽어 나가는 노동자가 우리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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