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섬나라인 뉴질랜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멋진 해변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발길을 멈추게 한다는 데 있다. 캠핑카를 몰고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다가 뷰포인트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올 때 멈출 여유만 있다면 눈호강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그런 뉴질랜드의 해변 중에서 최애하는 카이코우라의 윈도우 바탕화면 산책길과 차원 이동의 맛을 보여주는 북섬의 캐서드랄 코브와 함께 세 손가락에 꼽힐 해변이 바로 더니든 남쪽에 위치한 비밀의 해변 ‘터널 비치’다.

터널 비치와의 인연은 2007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섬 여행을 시작한 지 열흘쯤 되던 어느 날, 남섬 여행이 끝나 간다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돌아볼 심산으로 차를 몰다 해가 저무는 바람에 잠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교통지도 한 장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길을 찾아보지만 거기가 거기인 듯한 시골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결국 막다른 길까지 오고야 말았고,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워져 별수 없이 하룻밤을 길 끝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낸 뒤,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뜨는 부지런한 태양 때문에 강제 기상. 그제야 하룻밤 보낸 곳의 정체를 살피러 밖으로 나와 본다. 주변은 철조망이 잔뜩 쳐져 있고, 잡풀이 사람 키 높이만큼 자라 있어 앞쪽에 뭐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잡초와 철조망 사이를 건너갈 수 있는 디딤 계단이 놓여 있었고, 터널 비치라는 낡고 자그마한 표지판 하나가 떨어질 듯 걸려 있었다. 뉴질랜드 젊은 패거리가 새벽에 차 한 대로 몰려와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 대다 사라지는 통에 설칠 대로 설친 잠에 덕지덕지 붙은 눈곱을 떼면서 계단을 넘어 몇 걸음이나 갔을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턱관절이 저절로 상하 최대치를 찍는다.

찬란하고 또 찬란하게 햇빛에 부서지고 흩어지는 짙고 푸른 바다라니! 그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내뻗은 고래 등짝 같은 널찍하고 커다란 바위 언덕. 그 언덕을 향해 잡초 숲을 뚫고 길게 이어진 그림 같은 오솔길. 흠잡을 곳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완벽한 그림이 세상에 있다면 이런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꽉 찬 풍경.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생명체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턱관절을 되돌려 올릴 즈음에는 이미 고래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홀린 듯 이곳까지 한달음에 와 버렸다.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수직의 해안과 그 아래 앙큼하게 자리 잡은 작은 해변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위에 선 나는 마치 이 땅을 최초로 발견한 탐험가라도 된 듯, 팔을 쭉 뻗어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마주 선다.

잡을 수 있는 모든 똥폼을 다 잡아 사진에 담고 나서야 절벽 아래 작은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게 터널 비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절벽에서 어떻게 저기까지 가야 할지 난감했다. 절벽은 그야말로 깎아내린 모양이라 번지점프 이외에는 내려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때 먼저 주변을 살피던 일행이 고래 언덕 입구 쪽에서 급하게 손짓을 했다. 가보니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아니 ‘터널’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전쟁통에 난리를 피해 숨어 있을 곳을 찾아 뚫어 놓은 비밀통로 같기도 하다. 30개 남짓의 계단으로 된 터널을 지나면 비밀의 해변인 터널 비치가 한껏 감춰 뒀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기껏해야 이삼십 미터 남짓 될 것 같은 바위와 돌, 자갈이 섞인 해변. 절벽 사이로 옴폭하게 들어간 이 작은 해변 속으로 파고드는 파도 소리가 예쁘다. 마치 몽돌 해변의 자갈 소리처럼 귀에서 간질거린다. 왼쪽으로 보이는 고래 언덕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더 고래스러워 보인다. 먼바다를 그리며 한껏 고개를 쳐든 모습은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바다 쪽도 바다 쪽이지만, 해변의 등짝도 멋스럽기가 바다 못지않다. 수십 미터의 절벽을 타고 오르며 자란 이끼들은 마치 절벽 위에서 한껏 쏟아져 내려오는 초록의 폭포수 같은 느낌을 준다. 터널 속 숨겨 뒀던 바다 정원에서의 한 때라니, 길을 잃고서 찾아오기에는 너무 호강에 겨운 곳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 만났던 터널 비치를 12년 만에 다시 찾았다. 뉴질랜드의 여러 곳이 그렇듯이 터널 비치 역시 입구부터 새 옷을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농장 사이의 공터였던 입구는 말끔히 정비돼 주차장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잡초를 헤치고 넘어가야 했던 터널비치로 가는 길은 제대로 된 표지판과 함께 방금 면도를 끝낸 듯한 말끔한 모습의 산책길로 단정해져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을 탄 진입로는 몰라볼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고래 언덕 앞 바다를 비치는 찬란한 햇빛과 해변 뒤 절벽을 타고 내린 초록 이끼 폭포, 그리고 자갈 사이를 파고드는 물소리, 절벽을 타고 오른 이끼 폭포만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제법 잘 어울려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12년이 지났지만 터널 비치는 내게는 여전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귀한 바닷가로 남아 있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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