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전태일 동지에게 훈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전태일 동지가 이렇게 사후에라도 국가의 훈장을 받는 것은 대한민국이 동지의 삶과 죽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니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에게 훈장을 주는 이유가 “산업민주화와 노동인권 증진에 대한 공로”라니 많이 아쉽다. 전태일 동지 항거의 의미를 좁은 틀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동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의 가열찬 투쟁과 더불어 그가 남긴 일기와 수기 등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동지가 남긴 글 가운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여럿 있지만 필자에게 유독 와 닿는 글이 몇 개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수기에 적어 놓은 글이다. 첫 번째 수기 앞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소년은 누구, 무엇에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나는 왜 언제나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헌 때뭉치인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할까를.” 그리고 그 수기의 말미에 짧은 깨달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아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추호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본질을 해치는 것, 그것은 자본이 임금노동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 세상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인간 본질을 해치는 자본주의 세상을,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변혁하지 않은 채 노동자의 인권을 신장하겠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성공할 수 없는 헛된 시도다. 나쁘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본질을 은폐하는데 복무하는 불량한 기도다. 이번 훈장 수여가 전태일 동지의 반자본주의 투쟁정신을 희석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둘은 친구에게 쓴 편지다. 전태일 동지는 위의 수기를 쓰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친구 원섭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 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 나도 예외는 아닐세.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 뭉치기를 희망하지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 버리겠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어떤가.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인간은 이 그릇 밖을 자진해서 걸어 나가지는 않을 걸세.”

전태일의 항거를 기념해 매년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이 노동자대회에서 우리 노동자들은 과연 전태일 동지의 말처럼 이 사회의 덩어리 속에 뭉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덩어리를 분해하는 방법을 결정하고 분해하기 위한 투쟁을 결의하고 있는. 혹여나 “함께 살자”고 외치며 부스러기들을 만들어 내는 기득권자들의 덩어리 속에 뭉치고자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돌아볼 일이다. 예를 들어 20:80의 사회에서 그 분할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20에 속하고자 노력하는 것 말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대표적 부스러기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조운동 출신들이 노조 전국 지도부에 출사표를 내고 있는 지금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이 지점에서 정규직 노동운동과 얼마나 다른지도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셋은 전태일 동지가 그때그때 적어 놓은 일기 속의 단상이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이란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다.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가 진리다.” 전태일 동지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어지럽히고 있는 여러 정파들 가운데 어느 곳에 속할까. 농담 삼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우리 노동운동과 운동권은 대개가 수십년 전 학생운동에서 만들어진 정치이념이나 정치노선을 진리라고 간주하고 있는데, 지난 수십년간 우리 노동대중이 경험한 것들은 그런 고정된 정치이념이나 정치노선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때 한국 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파악하고 그에 맞춰 민족해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당면혁명의 목표로 설정한 정파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미제에 군사적·정치적·문화적으로 예속돼 있음에도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했다. 그러므로 반봉건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임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 건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이념과 노선을 취해야 한다. 이것이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다.

경험과 어긋나는 소리는 그뿐이 아니다. 자본가계급은 한국 사회가 지금 민주적이라고 주장한다. 여야 구별 없이 산업화도 됐고 민주화도 됐다고 한다. 다른 한편 유명한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운운하며 정치는 민주화됐지만 경제는 민주화되지 못했다면서 진보정당을 만들어 의회에 진출해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군사파쇼 통치가 민간파쇼 통치로 교체됐을 뿐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도 민주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안경찰법인 노동악법이 철폐됐는가.반공법을 포함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됐는가. 국가비밀경찰인 국정원이 해체됐는가, 사법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모두 아니다. 고로 반파쇼 민주주의 혁명이 선차적으로 필요하다. 삼성재벌 총수 이재용을 비호하는 사법부와 투쟁하면서 거듭 깨닫는 바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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