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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들의 은어
▲ 박일환 시인

내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국어사전 들춰 보는 일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잠시 바둑을 둬 본 적은 있지만 초보를 면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 일부러 시간 내서 둘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취미 중에는 낚시가 최고라고 하는 이가 있더라도 혹하지는 않는다. 대신 낚시와 관련한 말이 뭐가 있을까, 하는 식의 궁금증은 늘 갖고 있다. 그러던 차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특이한 이름의 고개를 발견했다.

구령(九嶺) : 열 번째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낚시꾼들이 고기 아홉 마리를 잡았음을 이르는 말.

아홉 마리를 잡았음을 나타내는 말이 있으면, 다른 마릿수를 낚았을 때를 이르는 말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왔다.

초개(初開) : 낚시꾼들의 은어로, 고기를 처음으로 한 마리 낚았음을 이르는 말.
재개(再開) : 1. 어떤 활동이나 회의 따위를 한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함. 2. <체육> 낚시에서, 두 마리째의 고기를 잡은 경우를 이르는 말.
안심(安心) : 낚시꾼들이 고기를 여덟 마리째 잡음을 이르는 말.
일관(一貫) : 1. 엽전의 한 꿰미. 2. 낚시질에서 열 마리째 낚았을 때를 이르는 말. 한 꾸러미가 되었다는 뜻이다.

세 마리부터 일곱 마리를 잡았을 때를 이르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있긴 할 텐데, 국어사전 편찬자가 미처 찾아서 싣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례는 너무 흔해서, 아쉬운 사람이 직접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찾은 게 아래 낱말들이다

시작(始作) : 세 마리를 낚았음을 이르는 말.
작정(作定) : 네 마리를 낚았음을 이르는 말.
정식(正式) : 다섯 마리를 낚았음을 이르는 말.
진행(進行) : 여섯 마리를 낚았음을 이르는 말.
면치(免恥) : 일곱 마리를 낚았음을 이르는 말.

세 마리는 잡아야 비로소 낚시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일곱 마리는 잡아야 낚시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체면을 차리게 된다고 한 표현들이 재치있게 다가온다. 누가 이런 말들을 처음 만들어 퍼뜨렸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낚시꾼들이 재미 삼아 주고받던 말들을 국어사전 편찬자가 낚아 올려 사전에 실었을 텐데, 미처 다 낚지 못한 실수가 생긴 걸로 봐서 우리나라 국어사전 편찬자들이 낚시질의 고수는 못 됐던 모양이다.

열한 마리를 잡으면 ‘일관초개’, 서른두 마리를 잡으면 ‘삼관재개’ 하는 식으로 잡은 물고기의 머릿수를 세며 즐거워했을 낚시꾼들의 풍류가 그려지는 낱말들이다. 국어사전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100마리를 잡으면 ‘일련(一連)’이라고 했다는데,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고수 중의 고수가 돼야 가능한 일이겠다.

바다낚시와 민물낚시의 구분을 비롯해 대낚시·릴낚시·루어낚시 같은 낚시 종류도 다양한데, 요즘 사람들은 듣기 어려운 낱말이 국어사전에 보인다.

덕낚시 : 물속에 설치한 덕을 타고 하는 낚시질.
덕 : 1. 널이나 막대기 따위를 나뭇가지나 기둥 사이에 얹어 만든 시렁이나 선반. 2. 물 위에서 낚시질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발판 모양의 대.

‘덕낚시’라고 하면 못 알아들어도 ‘좌대낚시’라고 하면 낚시꾼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좌대낚시’라는 말은 표제어에 없고 ‘좌대’만 다음과 같은 풀이와 함께 국어사전에 보인다.

좌대(座臺) : 기물을 받쳐서 얹어 놓는 대.

이 정도 풀이만으로는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물가에 편안히 앉아서 낚시를 할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좌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낚시 용어에 맞게 풀이를 보강해 줘야 하고, 아울러 ‘좌대낚시’라는 말도 따로 표제어에 추가해 주는 게 바람직하다. 예전에 쓰던 낱말을 찾아서 올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요즘 활발하게 사용하는 낱말들을 뜻에 맞게 풀이해서 올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일에 게으르면 국어사전은 고리타분한 옛날 말 창고로 전락하고 만다.

박일환 시인 (pih66@naver.com)

박일환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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