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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76] 김산이 넘어온 혁명의 열두 고개, <아리랑> ①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 장지학(張志鶴)” “소화 6년(1931) 1월14일” “재천진 일본총영사관” 등의 글씨가 뚜렷하다. 뒤로 쓸어넘긴 머리와 짙은 눈썹, 상대를 쏘아보는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김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84년. 두 권의 책이 대학가를 술렁이게 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김산·님 웨일즈의 <아리랑>. <노동의 새벽>이 대학생들에게 노동현장에 대한 관념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현장의 땀과 눈물을 체감하게 했다면, <아리랑>은 조선과 일본, 중국 대륙을 주름잡으며 항일혁명과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선배들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독자들이 <아리랑>에 매료됐던 것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부러워하며 조선혁명가들의 ‘대하혁명소설’을 꿈꾸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중국혁명의 도정에 한 조선인 혁명가가 바친 헌신과 그가 겪어야 했던 불행과 희생이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가슴을 쳤던 까닭도 있었을 터다.

동란(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가난한 조선의 농가에서 태어나 1938년 서른셋의 나이에 적이 아닌 동지의 총탄에 스러질 때까지 김산(본명 장지락 혹은 장지학)이 넘어온 아리랑 고개는 몇 구비이며, 오늘 우리가 넘고 있는 고개는 또 어디쯤일까.

나라 잃은 백성이 넘어야 했던 ‘나그네’ 고개

김산이 열네 살 때 3·1 운동의 메아리가 조선팔도에 울려 퍼졌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대오를 이루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누비는 장면을 본 어린 김산은 “너무나도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루 종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감격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혹했다. 일제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비폭력으로만 일관하는 조선 민중들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교회는 우리 민족의 편이라 믿었건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것은 하나님이 조선에 벌을 내리는 것”이며, “죄를 다 갚기 전에는 조선이 독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뇌까리는 선교사의 말에 그는 격분했다. 그에게는 더 넓은 세상,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연인원 300만명이 참가한 3·1 운동에서 수많은 구속자는 있었지만 사형을 언도받은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세계 여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제는 재판 대신 시위 현장에서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이다!’ 그가 3·1 운동을 통해 배운 교훈이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겠지만 봉건적이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세대’ 김산에게 가장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자 재정적 후원자는 평안북도 용천 시내에서 구둣방을 운영하던 작은형이었다. 둘째 형이 맡긴 돈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고학을 하면서 동경제대 입시를 준비하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관동대진재’. 동경을 비롯한 관동지역에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하자 민심의 이반을 두려워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자위(?)를 위해 무장을 해도 좋다며 공포에 빠진 일본 사람들을 선동해 공공연한 학살로 내몰았다.

수천 명의 조선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죽창에 찔려 죽고, 불에 타 죽었다. 일본에 넌덜머리가 난 김산은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짧은 일본 생활에서 그가 배운 것이란 ‘조선에 파견된 일본 군경들과 본토의 일본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모스크바로 가는 것마저 순탄치 않아 하얼빈에서 길이 막혔다. 다시 방향을 틀어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700리 길을 걸어 신흥무관학교을 찾아가 입학을 청원했으나 18세가 입학 최저 연령이라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당시 그의 나이 열다섯.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신흥무관학교에 오기까지 김산이 어린 나이에 겪은 고난과 열정에 감복한 학교당국은 예외적으로 3개월 단기과정을 허락하게 된다.

속성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보통학교 강사를 하다가 더 넓은 세상과 혁명을 꿈꾸며 상해로 떠난다. 그곳 상해에서 오성륜·김충창(김성숙)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의열단의 김원봉과 안창호·이동휘 등도 만나게 된다. 김원봉과 만나 아나키즘에 심취했던 그는 김충창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수받게 된다. 오성륜과 김충창은 김산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동지가 됐다.

▲ 1984년 한국에서 첫 출간돼 대학가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아리랑>. 사진은 2005년 다시 펴낸 책의 표지.

생사를 넘나든 광동코뮌의 ‘회오리’ 고개

아버지와의 ‘합의’에 따라 북경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김산은 다시 혁명의 뜻을 세우고 1925년 손문의 중화민국 정부가 있던 광동성 광주로 떠난다. 광주에서 조선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던 중 ‘운명의 해’ 1927년을 맞이한다.

1927년 12월10일은 장지락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일이 벌어진 날 가운데 하나”였다. 광동코뮌이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광동을 지배하고 있던 리지선(李濟深) 장군과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던 장파쿠이(張發奎) 장군의 분열을 이용해 가능한 빨리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27년까지 8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광동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우리 조선의 활동적 지도자의 정예가 여기에 다 집결한 것이다. 우리들의 평균 나이는 23세였고 일부 중학생들은 열너덧 살밖에 안 됐고 800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됐다.”

그러나 봉기는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조선 혁명가 200여명과 중국인 6천여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비록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광동코뮌의 충격과 감동은 이후 김산의 삶과 활동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선 코뮌 참가자들의 들끓는 혁명적 열정과 낙관주의는 그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봉기의 날. 그가 숙소로 사용하던 여관에서 20여명의 조선인들이 비밀집회를 가졌다. 그들의 심장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적을 때려 부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만 이야기했다. 성공하면 조국이 해방될 수 있어! 조국을 생각할 때면 우리의 가슴은 미래로 치달았다. 조국…!”

무장대오를 이끌고 코뮌에 참가한 조선인 지도자 박진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김산이 그의 부대와 부대원들을 보고 부러운 나머지 “형님네 사람들은 지금이 너무 행복해 보여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싸워 왔는데 이제는 평화로운 생활이 그립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박진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하,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는 평화가 단지 고통일 뿐이야!”

그러나 당시 중국 당내를 풍미하던 좌경모험주의는 혁명을 일시적이나마 좌절시켰고, 수많은 혁명가와 인민들을 희생시켰다. 광주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주와 군벌을 비롯한 반동을 척결하지도, 적들의 반공세에 대한 대비책도, 혁명적 규율도 없는 무맥한 상황을 보면서 김산은 불안과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봉기의 실패를 예감한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돌아온 반동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아니, 공포 그 자체였다. 봉기가 성공한 혁명 정세하에서 겨우 세 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한 대가로 수천 명의 혁명 참가자들과 애꿎은 민중이 도륙당했다. 혁명적 낙관주의자였던 조선인 지도자 박진도 희생을 피할 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김산은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았으니 혁명을 계속해야 했다. 가장 뜨거운 심장을 지닌 채 혁명과 조국을 사랑했던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해서라도 혁명은 계속돼야 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다시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코뮌의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다. 탈출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적들의 추격에 배는 뒤집어지고, 동료는 죽어 갔다.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주림에 시달리며 풀뿌리를 캐 먹었다. 살기 위해 ‘걸으면서 잠자는 법’도 익혔다. 홍콩을 거쳐 상해 프랑스 조계로 흘러들어 갔다.

끝내 넘지 못한 ‘사랑’의 고개

상해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거지처럼 생활하던 어느 날, 기적처럼 김충창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성륜과도 재회한다. 세 사람은 “상해에 있는 동안 엄청 가까워졌고 강한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를 사랑”했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혁명가에게 사랑은 축복인가, 금기인가. 아내 두군혜와 광주 시내에 숨어 지내며 조선인 혁명가들의 안전과 철수를 돕다가 상해로 넘어온 김충창은 물론이고, 오성륜도 상해에서 김충창의 처형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사랑의 힘과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김산에게도 연애를 권했으나 그는 단호했다. ‘혁명의 와중에 연애라니….’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혁명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그에게 남녀 간의 사랑이란 혁명의 장애물일 뿐이었다.

물론 베이징 시절 “강인하고 특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던” 류링을 만나 깊고 아픈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그러나 짧고 강렬했던 사랑의 시간에 대해서조차 김산은 “행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본질 속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없으며 행복함을 찾는 것조차도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수 있으나 김산이 ‘사랑의 아리랑 고개’를 넘지 못한 것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엄숙주의와 결벽주의가 낳은 필연적 소산이 아니었을까.

(다음 편으로 이어짐)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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