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에 있는 스웨터 수출업체 혜양섬유 생산공장. 내부 벽면 곳곳에는 ‘납품회사 운영규정’ 이란 제목의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벽보가 붙어있다.

‘주당 60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요구하지 말 것’ ‘소방 훈련은 6개월에 한 번 할 것’ ‘기숙사에 대형 사물함을 설치해줄 것’ ‘화장실에 수건을 비치할 것’ ‘작업장 온도와 조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것’ ….

혜양섬유의 수출선인 미국 의류업체 갭(GAP)이 이 회사에 요구한 ’ 20대 준수사항’ 이다. ‘비상구’ 표시판이 붙어있는 공장 출입문 위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비상구, EXIT’ 라고 쓴 큼지막한 종이 한 장이 더 붙어있다. 이 회사 김동길 상무는 “갭 쪽에서 비상구 표시를 눈에 잘 띄게 다시 붙이라고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선진국에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수출하는 국내 신발·의류업체들이 해외 바이어들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요구사항에는 근로조건, 직원 복지는 물론이고 화장실 청결, 방재훈련 횟수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망라돼 있다. 바이어들은 이들 요구사항을 준수하지 않으면 제품 구매를 거절하겠다고 국내업체에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 나이키에 신발을 납품하는 태광실업 김해 공장. 이곳에는 ‘SHAPE’ 라는 영문 작업구호가 벽면 여기저기에 걸려있다. 안전(Safety), 건강(Health), 종업원에 대한 대우(Attitude), 인간적인 작업조건(People), 환경(Environment)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조성제 경영혁신팀장은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과 중국 등 나이키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면 전 세계 어디에나 똑같은 구호가 붙어있다”고 말했다. 나이키는 1년에 3~4차례 본사 감독관을 태광실업에 파견, 자신들이 요구한 근로지침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선진국 바이어들이 이처럼 납품업체의 경영 전반에 까다롭게 간섭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지난 96년 나이키가 하청을 맡긴 인도네시아 신발업체가 어린이를 고용, 노동 착취를 했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시민단체들은 이에 항의해 나이키 본사로 몰려가 “인권 유린국으로부터 수입을 당장 중단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시민단체들은 ‘나이키 감시단’ 을 발족시켜 지속적인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이를 계기로 선진국 바이어들은 하청업체에 이른바 ‘준수사항’ 을 엄격히 요구하고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일부 바이어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불시에 공장을 방문해 암행감사를 벌이기도 한다. 공장 내 비상구와 위생시설, 소화전 시설을 체크하고 직원들 출퇴근 현황, 작업 일지, 원자재 입출고 내역까지 일일이 점검한다.

이에 대해 국내 업체들 사이에선 “지나친 경영간섭”이란 반발도 나오고 있다. 섬유수출업체 한솔의 양순현 대리는 “국내 섬유업체의 80% 이상이 직원 20명 안팎의 영세업체들이다보니 바이어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맞추지 못해 아예 수출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국내업체들이 바이어의 압력을 경영선진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의류업체 신원의 박일병 이사는 “글로벌 아웃소싱(외주)을 하는 해외 바이어들은 전 세계 하청업체에 똑같은 근로지침을 적용하고 있다”며 “그들의 요구가 WTO규정보다 강하긴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공장환경을 개선해 수출을 늘리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