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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아닌 치유 과정으로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율립)
▲ 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율립)

톨루엔·이소프로필알코올·자일렌·포름알데히드….

과학시간에도 들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생소한 이 물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들이쉬면서, 장갑도 제대로 끼지 않은 손으로 제품을 만질 때 내 몸에 흡수되고 원인 모를 희귀병의 원인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학원 운영 외에 다른 일은 해 본 적 없는 A씨는 49세 나이에 반도체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건강이라면 자신 있었던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야근과 주말특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물질로부터 제품을 보호하기 위한 방진복 외에는 보호장갑·보호구도 없이 일했다. 무엇인지 모를 약품을 만지고 빨갛게 벗겨지는 손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찍어 뒀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지 3년5개월 만에 ‘미만성 거대B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았고, 바로 수술을 받았지만 2주 만에 사망했다.

그가 일했던 공장에서는 분말 형태의 원료로 제품 틀을 만든다. 규격에 맞게 자르고 구멍을 뚫은 후에는 열을 가해 압착하고 가공하는 일련의 공정을 거쳐 반도체 부품을 만든다. A씨가 맡았다고 하는 펀칭공정은 제품에 구멍을 뚫는, 전체 공정에서 중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공정이 하나의 층(공장 1층)에서 함께 진행됐다. 한 개의 공조시스템으로 공기 재순환이 이뤄져 인근 공정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A씨는 평균 주 6일 이상 하루 10.5시간 근무했다. 작업환경측정 당시 펀칭공정에는 상시근로자가 배치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을 보면, 펀칭공정 외에 다른 업무도 맡았을 개연성이 높았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해물질에 노출된 것으로는 보이지만 그 기간이 짧고, A씨가 일했다는 공정에서는 위 질병의 원인이 될 만한 유의미한 노출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질병과의 인과관계에 대한 역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 내렸다.

일하면서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되는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안전장비가 필요한지, A씨가 일할 당시에도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유족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A씨가 맡았다는 공정에 상시배치 근로자는 없었는데 야근과 주말 특근까지 해야 했던 이유와 구체적으로 했던 일, 그 과정에서 노출된 유해물질을 유족이 밝힐 수는 없었다. 산재신청 후 진행된 역학조사에서는 A씨가 일할 당시와는 이미 배치가 달라진 공정을 토대로, A씨가 일한 환경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 채 조사가 진행됐다. 누구보다도 정확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을 회사는 소송 과정에서도 이미 오래전 일이라 당시 관리자는 퇴사했다고 밝혔다. 관련 자료도 존재하지 않아 A씨가 일했을 당시의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만 했다.

A씨가 사망한 지 6년여가 지난 올해 6월에 이르러서야 법원 판결을 통해 A씨 사망이 산재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법원은 A씨가 담당했다는 공정 외의 공정에서 사용하고 발생하는 유해물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부실한 역학조사와 사업장 전체에 대해 진행되지 않았던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형식적으로 반영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회사가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사정 또한 당시 근무환경의 위험성을 노동자측에서 밝힐 수 없는 사정으로 적극적 고려했다.

남편의, 아버지의 황망한 죽음 앞에 가족들은 추모와 치유의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죽음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 6년을 보내야 했다. 별다른 기왕 병력 없이 건강하다가 유해화학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고,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희귀병에 걸린 노동자의 몸이 곧 가장 정확한 증거가 아닐까. 피해 당사자들에게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고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도록 한다면, 산재신청·불승인·소송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버텨야 하는 몫은 또다시 온전히 해당 노동자와 가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 기준 또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가족들이 고통과 인내를 감수하고 싸워 온 결과일 것이다.

법원 판결이 아니라 산재신청 단계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그 과정이 노동자와 가족에게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아닌,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민애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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