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은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전문위원

28일은 국제자유노련(ICFTU)과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1993년 태국 인형공장 화재로 발생한 노동자 188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는 날이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전 세계 노동자를 기억하는 날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은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해에만 855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생계를 위해 일터로 향했을 이들은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깔리거나, 부딪혀 사망했다. 화재나 폭발·익사·질식사고를 당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도 적지 않다. 날마다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

단순하고 동일한 유형의 사고가 오랜 기간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업재해는 사회구조적 문제다.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문제에 공감하는 노사정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어 원인을 밝히고 해법을 도출하는 방식이 최선이다. 따라서 ‘사회적 대화’는 실효성 있는 산재예방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과로사 대책’ 담은 최초의 노사정 합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의제별위원회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27일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2018년 산업안전보건위 출범 이후 1년8개월 만에 도출된 합의의 핵심은 ‘안전의 불평등 해소’다. 안전의 불평등은 우리 사회 후진적 관행의 산물이다.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도, 우리는 ‘과로’를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과 만나게 된다. 과로는 근면과 성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안전보다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던 시대의 자화상이다. 과로의 망령은 오늘도 건재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급증한 택배물량을 나르던 노동자가 중노동 끝에 죽어 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소득의 불평등은 노동시간의 불평등으로, 다시 안전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위의 이번 합의는 과로사 대책을 담은 최초의 노사정 합의라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노·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격론이 오가기도 했지만, 과로사 예방을 위한 종합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노사정은 과로사 예방 관련 조사·연구·교육·홍보·지원책이 포함된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세부계획을 수립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위해 노사정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하고, 업종별 근무형태·노동시간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이번 합의는 과로사 관련 법·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여론을 환기하고 개혁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노사정 협의를 통한 개혁 추진력 확보야말로 사회적 대화의 힘이다.

‘산업안전보건 행정체계 개편’ 청사진 제시

노사정은 기업규모나 업종·고용형태 차이에서 비롯되는 안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정부가 안전보건 사각지대인 중소기업의 산재예방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관련 예산을 늘리기로 약속한 것이 대표적이다.

노사정은 제조업·건설업 위주로 설계된 기존 안전보건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서비스업에도 주목했다. 제대로 된 통계조차 찾기 힘든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서비스 분야 유해위험요인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법·제도 개선을 위한 TFT를 구성하기로 했다. TFT에서는 플랫폼노동 같은 새로운 고용형태에서 나타나는 산재유형과 원인에 대해서도 다루게 된다.

노사정은 산업안전보건 행정체계 개편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산업안전보건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독자적 기구 설치가 필요하다는 데 노사정이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중장기 과제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검토하기로 한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성취다.

노사정 합의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지만, 합의사항이 잘 지켜졌을 때 의미가 배가된다. 노동관계법상 근로자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 모두’의 안전을 고려한 이번 합의가 소중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도 따뜻한 감시의 시선을 보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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