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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49] ‘잠들지 않는 남도’의 정신적 뿌리, 봉강 정해룡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한평생 민족의 독립과 남북합작을 통한 통일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봉강 정해룡이 태를 묻고 생을 마감한 봉강 고택. 전남 보성군 희천면 봉강리 677번지.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은 이제 역사체험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5년 8월15일 새벽. 전남 보성읍내에 위치한 보성인쇄소에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급하게 옷을 입고는 봉강마을로 내달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마을은 심상치 않은 기운으로 술렁였고, 너른 저택 마당에서는 횃불을 밝힌 채 무언가를 만드는 손길들이 숨죽인 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2시가 되자 동네 청년들이 주축이 된 봉강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풍물을 치면서 죽창을 들고 신사로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조국이 해방된 것이다. 일제가 패망한 후 최초의 해방기념투쟁으로 기록될 이날 시위의 중심에 봉강(鳳崗) 정해룡(丁海龍)이 있었다.

천석꾼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

봉강은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 직후인 1913년 7월2일 전남 보성군 희천면 봉강리 677번지에서 태어났다. 천석꾼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일제시기에는 가난한 빈민을 위한 구휼사업에 힘쓰는 한편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인촌 김성수가 추진하던 보성학교 설립에 큰돈을 희사했으며, 나중에는 고향마을에 직접 양정원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창설했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와 연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좌우를 망라하는 인사들과 교분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정국에는 여운형과 의기투합해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운형 암살과 한국전쟁으로 낙향해 있던 그는 4·19 이후 등장한 혁신계에 동참,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봉강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재산과 노력,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쳐 싸웠다. 해방과 전쟁, 혁명과 쿠데타로 점철된 지난 100년 동안 그의 일가 8명이 학살당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하여 어떤 이는 이 집안의 역사를 가리켜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여기에 또 하나의 <태백산맥>이 있다”고도 했다. 도대체 이 집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추진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야기는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국의 넋은 유전자로 대물림되고

영성(靈城) 정(丁)씨 가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봉강의 13대조인 반곡(盤谷) 정경달이다. 정경달은 임진왜란 당시 선산군수로 있으면서 육지에서 왜군과 싸워 유일하게 승전을 기록한 인물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진사 급제해 벼슬에 들었다가 3개월 만에 관직에 한계를 느끼고 향리로 내려와 버렸다. 그가 야인으로 있으면서 사귄 인물들로 곽재우·고경명·김천일 등이 있다.

정경달의 애국적 일생은 충무공 이순신과의 만남에서 꽃을 피운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모략으로 옥에 갇힌 이순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세 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올린 그는 임금 앞에서 “이순신이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호소해 기어이 선조의 사과를 담은 교지를 받아 낸다.

이순신과 함께 승주군 낙안에서 병기를 수집하고 보성창고에서 군량미를 거두어 회령포(현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앞바다)에 당도한 정경달은 일본에 패해 숨어 있던 이억기의 군사들과 배 12척을 이끌고 명량해전을 준비한다. 결전을 앞둔 시각, 정경달은 벽파정에서 선조의 교지를 낭독했고 이순신은 ‘순신이 있고 12척의 배가 남았다’는 유명한 상소를 올린 후 함께 최후 결전의 길에 나선다.

정씨 집안사람들은 종사관으로서 이순신과 생사를 함께했던 정경달의 애족애민의식이 유전자처럼 대물림했다고 믿고 있다. 오늘도 정씨 집안과 이순신 집안은 서로 사촌의 예를 갖추고 혈연적인 유대를 이어 오고 있다.

“인재 양성에 민족의 장래가 달려 있다”

봉강의 민족의식은 민족교육에 대한 관심과 헌신에서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민족인재의 양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한때 인촌 김성수와 의형제를 맺고 보성전문학교 설립에도 참여해 상당한 금액을 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촌의 친일행각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이에 비례해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봉강이 양정원을 독자적으로 세운 것을 두고 인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양정원은 일제시기 보성의 자부심이었다.

지금도 보성지역 사람들은 ‘양정원과 전국 최초로 신사에 불을 지르고 8·15 기념집회를 거행한 것, 그리고 단위 부락별로 있던 농협을 통합한 것’을 ‘보성의 3대 자랑’이라고 말한다.

보성인쇄소는 봉강의 활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봉강은 보성읍내에 자본금 2만5천원을 투자해 당시 전남도 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보성인쇄소를 인수해 대표를 맡았다.

그가 인쇄소를 경영하기로 한 것은 자금 확보라는 측면 외에도 지역 내 인텔리들이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쇄소에는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사회주의 경향 지식인들로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봉강은 이곳을 통해 국내외 정세와 관련한 은밀한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접한 것으로 보인다.

보성인쇄소에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전화기가 있었다. 봉강이 서울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설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누구보다 먼저 봉강이 알게 된 것도 이 전화기 역할이 컸다. 보성은 통신뿐만 아니라 교통도 일찍이 발달해 보성~서울 간 철도가 1920년대에 이미 개통된 상태였다. 봉강이 전라도 한갓진 곳에 있으면서도 서울과 만주의 정보를 빨리 접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과 통신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제의 발악이 최후를 향해 달려가던 1943년 봉강은 만주에 갔다 오다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다행히 별다른 증거가 없어 풀려나긴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민족의 해방에서 민중의 해방으로

봉강은 해방이 되자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며 무상분배는 아니지만 쌀 한 되도 좋고, 두 말도 좋고 형편 되는 대로 가져와서 전답문서와 바꿔 가도록 했다. 말이 유상분배지 무상분배나 다름이 없었다. 더불어 그들은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봉강은 곳간의 쌀을 모아 놓고 노비들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종살이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 쌀을 가지고 나가서 살아라.”

그러나 만세를 부를 줄 알았던 노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댁에(여기)보다 좋은 디가 워딨다고 나가라고 그러신다요. 여그서 그냥 살라요.”

봉강은 고집부리는 노비들을 설득해 가재도구며 쌀말을 지워서 기어이 독립시켰다. 종갓집에서 이러니 일가에서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과의 만남과 좌우합작 노선

그해 8월 말에는 희천면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장으로 봉강이 추대됐다. 봉강은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봉강과 몽양의 관계는 각별했다고 한다. 정치적 동지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대함에 있어서도 극진했다. 몽양은 당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봉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흔쾌히 수락한 봉강은 서울 계동에서 송정리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다음날 오전 집문서를 맡기고 자금을 만들어 마대 자루에 담아 계동사옥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극심한 탄압과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여운형의 중도노선은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1947년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큰 충격을 받은 봉강은 몽양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낙향한다. 이후 김성숙과 장건상 등이 중심이 된 근민당 재건 시도가 있었고 봉강도 여기에 참가했지만,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남로당을 비롯한 133개 정당·사회단체 등록을 취소하면서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된다.

정씨 집안의 수난은 전쟁 직전에 일어난 여순봉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여순봉기를 일으킨 14연대가 봉강마을로 들어오면서 뒤숭숭해지던 마을 분위기는 토벌대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14연대가 물러나자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당연히 봉강과 그의 집안이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고 그는 경찰에 붙들려 몇 달간 유치장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한국전쟁이 터졌다. 보성까지 진주한 인민군은 그의 집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접수했다. 잠시였지만 이 일을 기화로 봉강의 집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인민군이 후퇴하자 토벌대가 들이닥쳐 마을 청년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했고 봉강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 다니다 평소에 그를 흠모하던 경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의 비극은 형제의 생이별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 서울시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었던 동생 해진은 북으로 갔고, 훗날 대남연락부 부부장이 돼 보성으로 내려온다. 이것이 발각돼 봉강의 아들인 정춘상은 사형, 정길상과 사촌 아재뻘인 정종희는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봉강은 이 사건이 나기 10년 전에 자신의 태를 묻은 고택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4·19 혁명 직후 치러진 7·29 총선에 출마한 봉강은 장면의 비서가 보성에 내려와 일주일이나 머물면서 민주당 신파로 출마할 것을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결국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고배를 마셨고, 당도 통일사회당과 사회당으로 분열된다.

4·19 혁명으로 햇빛을 본 것도 잠깐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와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이 바람에 법적 근거도 없는 ‘특수반국가행위’라는 죄명으로 구속된 봉강은 1962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

1969년 음력 9월17일, 봉강은 밤새도록 시를 읊다가 아침상을 물린 후 갑자기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57세. 그가 걸어온 길, 꾸었던 꿈, 해야 할 일을 놓고 보자면 너무도 짧은 생이었다.

봉강이 서거한 이듬해인 1970년, 장건상·홍남순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로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추모비에는 ‘우국지사 봉강 정해룡’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추모비는 ‘우국지사’라는 표현이 문제가 돼 세워지지도 못한 채 땅에 묻히고 말았다. 이 역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이었다. 그러다 1995년 25년 만에야 빛을 보게 됐다.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여기 한평생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금석 같은 정성을 쏟아 놓은 애국지사가 계셨으니 봉강 정해룡 선생이시다. (중략) 밤은 고요하여 늘어진 잎사귀에 하늘 바람 내리고 달은 밝아 뿜은 향기 시냇물에 서리었으니 선생이 피운 애국의 꽃은 길이 시들지 않으리라.”

봉강의 한생을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묘사한 이 문장에는 남도가 저항의 고장, 반역의 땅으로 우리 현대사를 짊어질 수 있었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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