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박대호 장군(1892~1947년)


1920~1930년대 서간도 항일무장투쟁의 맹장, 박대호(朴大浩, 1892~1947년)는 중국 동북의 환인·관전 일대에서 압록강을 넘나들며 20여년간 일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운 투사였다. 항일투쟁의 불길 속에서 복벽주의에서 공화주의로,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생각을 바꿨고 통의부-의군부-참의부-국민부 산하 독립군으로, 다시 동북항일연군으로 조직도 바꿨다. 오직 조선독립을 위한 선택이자 헌신이었다. 박대호는 경북 청도군 화양읍 고평동의 어느 농민가정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상춘(相春), 호는 춘가(春可)로 별명은 대호(大虎, 大豪, 大鎬)였다. 한때는 청암(靑岩)이라고도 불렸다.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청소년기에 의병운동을 보면서 나라 찾을 의지를 키웠다. 1919년 초 박대호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관전현 보달원 고령지로 이주했다. 관전·환인·집안·흥경 등지로 이주한 조선사람이 3만명을 넘었다.

3·1 운동 참여, 서간도 망명

박대호는 1919년 3·1운동 직전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가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이를 확산하려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20일간 갇혔다가 석방된다. 그의 나이 27세 때 일이니 모종의 독립운동단체에 관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나 구전에도 세부내용이 없다. 단지 친지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동생 박영호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다시 나왔다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는 박영호 가족을 환인현 상전자에 이사시키고 곧 다시 가족 전부를 관전현 태평소에 정착시켰다. 환인·관전·흥경 등 남만주 일대로 번진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3·1 만세시위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비폭력 무저항 노선의 영향을 받았지만, 두만강·압록강 주변의 연해주·북간도·서간도 일대 독립운동은 반일무장투쟁 노선이 강했다. 박대호도 1919년 5월 집을 떠나 총을 잡았다.

그는 일찍이 소문을 들었던 독립군 ‘천마산대’를 찾아갔다. 평안북도의 의주·귀성·삭주 3개 군 접경의 천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 부대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가장 용맹해 철마병영이라 불리기도 했다. 박대호는 최시흥·최지풍·박응백 등이 이끄는 천마산대에서 혁명의 도리를 깨우치고 반일투쟁의 전략·전술을 터득했다. 나중에 조선혁명군 사령을 맡은 양세봉도 이때 천마산대에 있었다. 이회영 등이 유하현 고산자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청년무장역량을 배양할 때다.

1920년 천마산대는 오동진이 이끄는 대한광복군 총영과 통합했고 박대호는 소대장을 맡아 양세봉과 함께 압록강 조중 접경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관전·환인·신빈·집안 등지로 다니면서 영활한 유격전술로 경찰서를 습격하고 교통시설을 파괴하고 통신선을 차단하고 무기 탄약을 노획하고 일제 앞잡이들을 제거했다. 1922년 8월30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한교회·대한광복단·대한정의군·대한광복총열·평북독판부·통군부 등 8개 독립운동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해 통합기구인 통의부를 설립했으나 복벽주의와 공화주의의 이념 차이로 갈등과 충돌을 겪었다. 그러다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에서 복벽주의 의병정신을 계승하자는 전덕원 주도의 의군부가 이탈할 때 박대호도 이에 합류했다.

통의부-의군부-참의부-국민부 소속 무장

의군부와 통의부는 서로 대립해 상대 부원을 납치·살상하는 동족유혈전까지 자행했다. 각지의 교민 유지들이 화해를 촉구하는 동시에, 중립적 태도의 통의부 내 1·2·3·5중대는 1923년 8월 500명 이상이 통의부와 관계를 끊고 상해 임시정부에 직할 군단의 설립을 요청했다. 1924년 6월26일 집안을 중심으로 무송·장백·안도·통화·유화 등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가 수립됐다. 중국대륙에 공화주의가 대세로 등장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기운이 확산돼 복벽주의 계열의 의군부는 위축되고 그 잔류세력은 참의부로 편입됐다. 통의부의 남은 조직은 1924년 11월 결성된 정의부에 대부분 합류했다.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현에서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출신들 주도로 신민부가 결성됐다.

1928년 9월 길림에서 정의부·신민부·참의부 각 대표가 모여 국민부로 통합하고 이를 지도하는 정당과 무장부대를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으로 개편했다. 박대호는 통의부-의군부-참의부를 거쳐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지휘관이 된 것이다. 1931년 12월19일 조선혁명당과 국민부가 긴급회의 중 일본 경찰들에게 포위돼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후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학규를 참모장, 박대호를 1로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9·18 사변 이후 동북지방 군벌 장학량은 반일보다 반공을 앞세운 장개석의 권유로 관내 서안으로 이동했지만 항일반만의 기치를 든 수많은 동북 구국군이 출현했다. 1932년 당취오가 요녕민중항일자위군 총사령부를 설립한 것도 그 일환이다. 양세봉이 당취오와 연합해 항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박대호 부대는 당옥진 부대의 특무대로 들어갔다. 각종 지원 연대에 필요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1932년 9월 박대호 부대가 만주국 압록강지구 사령관 서문해의 8개 연대 약 1천명의 위만군과 일본군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는 관전현 우모오를 포위 공격했다. 9월7일 새벽 공격이 시작되자 박대호는 조선혁명군 돌격대를 인솔해 우모오 거리로 진격하고 포화 속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 서문해는 도주했고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후에도 조선혁명군 특무대는 요녕민중자위군과 신빈·통화·류하·무순·청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용감히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선혁명군과 요녕민중자위군의 연합작전

1933년 1월 신빈현 왕청문에서 개최된 조선혁명군 골간회의에서 양세봉이 사령을, 박대호가 부사령을 맡기로 결정했다. 4월 산성진에 주둔한 위만 봉천성 경비사령부 사령관 우지산은 일본군 감독하에 요동 일대의 항일무장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박대호는 역량을 보존하면서 적들을 타격하기 위해 대오를 후퇴시켜 집안 쌍분자·문자구·마의촌 노령·임강 일대의 국경선에서 활동하며 압록강을 건너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당시 압록강·혼강·부얼강, 3강 유역에 널리 회자돼 적들은 ‘대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했다고 한다.

일제는 양세봉·박대호·최윤구·장명도 등 조선혁명군 지휘관들을 잡으려고 갖은 음모를 꾸몄는데, 1934년 9월19일 양세봉 사령이 일제의 간계에 의해 변절자에게 암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김활석이 조선혁명군 사령으로 추대되고, 박대호가 부사령 겸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국민부 법무부장으로 결정됐다. 이 시기 단동과 집안 중간지점인 하로하의 마가자에 조선학교를 꾸리고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가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는 잔혹한 3광 정책을 실시하고 밀정을 들여보내 간부들을 체포 또는 변절하게 하고 인민대중에 의거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조선혁명군 내부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항일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박대호는 최윤구와 함께 1935년 1월부터 동북인민혁명군과 연대투쟁을 모색했고 1937년 신빈-환인 접경의 신개령에서 산채를 구축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해 4월 조선혁명군 1사 사령 한검추와 교육부장 윤일파 등이 일제에 투항하자, 박대호는 최윤구 등과 함께 6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가 1로군 1군 조선인 독립사를 편성해 눈부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최후의 순간에 부하들에게 “살아서 김일성 사령을 찾아가라”는 양세봉 사령의 유언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1938년 12월 일제 토벌작전에 맞선 화전현 홍석랍자 소유수하자 전투에서 적 100여명을 격살한 후 최윤구가 전사했다. 박대호는 혼자 남아 악전고투했지만 누적된 병으로 전투를 지휘할 수 없게 돼 일부 부대원들을 데리고 집안·통화·무송 등지와 안도 이도백하의 밀림 속에서 겨우 생활하면서도 군자금을 모으는 등 지하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조선혁명군 잔존세력의 동북항일연군 합류

그러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1943년 2월 무송현 산굴 밀영에서 불행하게 일제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때는 1940년 2월 동북항일연군 군장 양정우가 이미 전사하는 등 1군은 거의 전멸했고 그해 10월 김일성 중심의 2군은 소련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박대호는 무송현 감옥을 거쳐 안도현 명월구 태평촌의 반일분자 수용소로 이감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석방됐다. 하지만 잔혹한 고문과 형벌에 시달린 박대호는 음력 1947년 12월15일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동생 박영호는 형 박대호가 혁명에 투신한 후 두 집 살림을 맡아 보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1년 2월 박영호가 18세 당시 일제의 간첩이자 변절자인 정만기·박수림·전주일 등이 집에 들이닥쳐 위협하고 돌아간 이후 온 식구들을 데리고 박대호가 있는 조선혁명군 1로군 사령부로 찾아갔다. 그때부터 박영호는 소대장직을 맡아 사령부 고위 간부들의 가족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1935년 조선혁명군 박대호 부대와 요녕민중자위군의 장경옥 부대와 연합해 사첨자·하로하에서 일만군을 쳐부순 다음날 일제는 그 보복으로 근거지를 포위, 박영호 소대장을 총살하고 박대호의 만삭 맏며느리를 칼로 찔러 죽였다. 박대호의 큰아들 박윤희, 둘째 아들 박윤규는 끈으로 묶여 경찰서로 압송되던 중 탈출해 가족과 아이들을 상전자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 보내 피신시켰다. 박대호·박영호의 후손은 이렇게 대를 이을 수 있었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정부는 박대호 장군 서훈해야

그 손자들이 1993년부터 조부 박대호의 독립유공자 보훈 신청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탈락되고 있다. 경북 청도 화양읍 사무소의 호적에는 언제 누가 파 버렸는지 박대호가 없다. 중국 당국도 박대호의 구속·재판·석방 관련 자료를 보관하지 않고 있다. 손자는 조부와 부친의 가족관계를 증명할 생존자도 이제 없다고 말한다. 증거·증인이 없다고 역사적 진실이 사라지는가? 한국 정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 장군을 서훈으로 복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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