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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38] “기름에 젖은 머리 베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로!”-기생에서 여성해방운동가로 거듭난 정칠성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정칠성(1897~1958)

기생(妓生). 사전에는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통속적으로는 그저 “술 따르고 노래 부르며 몸도 파는 천한 여자”쯤으로 인식한다.

기생에 대한 낮은 인식에 관해 부당함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전통문화를 파괴하거나 폄훼하기 위해 일본 게이샤는 문화예술인으로 격상시키고, 조선 ‘기생’은 ‘매춘여성’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 칭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꽃(여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시도 짓고, 노래나 연주도 할 수 있고, 마음이 통하면 정도 나눌 수 있다는 의미일 터다. 봉건이 지배하던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는 상당한 상찬(賞讚)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남존여비 잔재쯤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기생들도 적지 않다. 유명하기로는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로 알려진 황진이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민족적 수난이었던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진주의 논개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튼 여러 견해를 종합하자면 일제 식민지 통치 이전의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과 비슷한 직업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춘향전>에서 춘향의 엄마인 월매에 대한 묘사를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이 여덟에 스스로 기생이 되다

그런데 나이 여덟에 스스로 기생이 된 인물이 있다. 정칠성(1897~1958)이 그 주인공이다. 기생이었을 때의 이름은 금죽(錦竹)이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비단 같은 대나무’란 뜻이다. 부드러움과 고급스러움의 상징인 비단과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란 두 낱말의 조화가 자연스럽지는 않다. 정칠성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나이 여덟 되는 해에 대구 관찰사가 주최한 연회에서 춤과 노래하는 기생들을 보고 거기에 반해 선배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기예(技藝)를 배웠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타고난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의 부모도 어쩔 수 없어 기방에 적을 올렸는데,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재주가 뛰어나 당대 유명 인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운명을 바꾼 3·1 만세운동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기생에서 민족주의자로, 여성해방운동가로 변신한 다음 세상에 알려진 이름이 정칠성(丁七星)이다. 본인 스스로 지은 것인지, 함께 활동하던 동지 가운데 누군가가 지어 준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가장 신성시했던 별자리가 북두칠성이다. 그 으뜸별인 북극성은 캄캄한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알려 주는 나침반이었다. 그렇다면 칠성(七星)이라는 이름에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 민중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해방의 등대가 돼 달라는, 혹은 되고 싶다는 염원이 담긴 것은 아닐까.

세상에 우연은 없고, 역사 발전이 담벼락 뛰어넘는 경우가 없듯이 정금죽이 정칠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생에서 민족주의자로 ‘운명적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19년 전국적으로, 전 민족적으로 벌어진 3·1 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심경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 보자(아래 인용문은 1937년 1월1일 발행된 <삼천리> 9권1호에 ‘저명인물 일대기’에 실린 것을 오늘 어법에 맞게 고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즉 스물한 살 때 당시는 3·1 운동 직후라 조선 안은 어수선했다. 깊은 뜻은 모르지만 종로네거리에 서서 (군중들의 시위를) 바라보는 젊은 가슴은 흥분에 넘쳤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 뒤를 따라다닌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활동사진에서 본 것과 이때 받은 충동은 마침내 현해탄을 건너게 했다. 거기서 어학(일본어)도 배우고 서양 갈 준비로 영어도 배우고 타이프라이터도 배웠다. 그러던 중 차차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돼….”

재주가 뛰어난 일개 기생에 불과했던 ‘금죽’이 3·1 운동에 감동해 일약 민족주의자·사회운동가인 ‘칠성’으로 거듭났다는 고백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촛불항쟁에 고무된 유명 가수가 평화운동가로 투신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시대를 앞서간 여성해방운동가

세상에 눈을 뜬 정칠성은 미국행 대신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서 대구에 여청(대구여자청년회)을 조직한다. 1924년 5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집행위원이 됐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경성에 여성동우회를 조직하며 전조선청년대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동경으로 건너간 때는 25세였는데, 동경에서 여학생학흥회 간사로 활동하는 한편 삼월회에 참여해 ‘로자룩셈부르크 여성과 사회’란 팸플릿을 발간하였다. (…) 서울로 돌아와서 여러 동무들과 함께 근우회를 창립하고, 당시 조직부 책임자로 조선 각지를 순회한 다음 출판부 책임을 겸해 활동했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역사적 의미를 띤 여성단체 근우회는 나의 결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신간회 간부로 전조선대표대회 대표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짧은 기록이지만 조선 최초의 여성단체를 만들고, 신간회와 근우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조직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인용한 <삼천리> 9권1호 ‘저명인물 일대기’에는 도산 안창호·몽양 여운형·벽초 홍명희·춘원 이광수 등 당대의 거물급 인사들이 함께 소개돼 있다. 당시 정칠성의 사회적 위상과 평판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불령선인’ 낙인이 찍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소위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이후 일제에 의해 혹독한 고초를 겪다가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에는 외부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서울 낙원동에서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 활동을 알리기 위해 만든 잡지의 표지. 정칠성은 자신의 결심과 결단으로 근우회를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스스로 개척한 자주적인 한생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한 정칠성의 투쟁은 다른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군정에 의해 불온시됐다. 38선 이남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는 1946년 북으로 올라간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된다. 남으로 치자면 제헌국회 의원이 된 것이다. 1956년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을 지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탁월한 조직적 수완을 발휘한 그에게 적절한 정치적 예우가 차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남로당계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설이 있지만 이 또한 확인할 방법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61세에 사망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온다는 환갑(還甲)에 생을 마감한 정칠성의 한생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헤쳐 온 일생이었다.

여덟 살의 나이에 스스로 기생이 된 것도, 3·1 만세운동에 감동받아 일약 민족주의자가 된 것도 그렇고, 생의 마지막 시기를 북에서 보낸 것도 모두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선택은 남쪽에서 항일투쟁·여성해방운동의 선각적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처럼 정칠성의 항일운동 업적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출신지인 대구에서 지역 출신 항일운동가 복원작업이 이뤄지고 있고, 여성운동계에서 그의 선각적인 노력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3·1 운동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오늘의 시점에서 남·북·해외 8천만 겨레 공동의 자산이자 정신적 뿌리인 항일독립운동은 남과 북,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온전히 복원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만이 21세기를 열어 나갈 희망의 뿌리이자, 평화번영과 통일로 가는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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