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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12년 12월2일부터 6일까지 중국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한중일의 각 노동연구원(KLI·CALSS·JILPT)이 개최한 10차 동북아노동포럼을 다녀온 적이 있다. 대개 국제회의에서는 주제를 영어로 적는다. 그런데 당시 동북아노동포럼 주최국인 중국은 각 나라의 언어로 주제를 병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중국은 ‘勞動關系矛盾的源頭治理’(노동관계의 모순적 근원을 다스림), 일본은 ‘勞使關係のガバナンスに關する諸要因’(노사관계의 거버넌스에 관한 제 요인), 한국은 “노동분쟁의 조정 및 예방”이었다. 각국이 한자를 병용하지만 선택된 단어와 표현이 조금씩 다른데, 이 차이에서 노동관계를 바라보는 각국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영어로 표기하면 편리함은 있지만 시각의 다양함이 사라진다. 획일화와 표준화는 강자의 시선을 담아내는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모순론>의 나라답게(?) 노동관계를 ‘모순관계’로 바라본다. 모순이란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해소되기 어려운 대립과 긴장을 말한다. 이는 일단 발생하면 해소되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발생 자체를 막는 것이 필요하다. 즉 그 모순의 근원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모순의 근원을 다스린다, 여기에는 철학과 정치와 종교의 세 가지 차원이 결합된다. 모순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 그것을 합법칙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여기에 반발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무지의 소치라는. 과학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도그마로 승화된다.

청두의 중심에는 톈푸(天府)광장이 있었다. 톈푸광장은 음양오행설에 기반해 조성된 광장으로서 하늘에서 바라보면 태극문양이었다. 광장의 북쪽에는 ‘弘揚法治精神 樹立法治理念 建設法治成都’(법치정신 선양, 법치이념 수립, 법치성도 건설)이라는 법치 선전탑이 서 있었고, 그 너머에는 쓰촨과학기술박물관(四川科技館)이 있었고, 박물관 앞마당에는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이 톈푸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도시의 공간 구성은 결코 이데올로기 중립적이지 않다. 톈푸광장을 중심으로 한 청두의 공간 구성을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첫째, 철학적 차원으로서 쓰촨과학기술박물관(과학)과 모택동 동상(사회주의)의 결합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상징한다. 둘째, 정치적 차원으로서 과학적 사회주의와 법치 선전탑의 연결은 중국에서 말하는 법치가 사회주의적 합법칙성임을 의미한다. 셋째, 톈푸광장이 태극문양이라는 것은 사회주의적 합법칙성이 종교적 도그마로 승화되고 있음을 표상한다. 요컨대 과학적 사회주의(철학)에 기반한 사회주의적 법치(정치)를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일본은 노동관계 대신 ‘노사관계’라는 표현을 선택했고 그 운영 원리를 ‘거버넌스’로 개념화했다. 노동관계가 객관적 표현방식이라면, 노사관계는 노동을 사이에 둔 두 주체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협치(協治)’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곧 국가 같은 제3자의 개입(統治)이 아니라 노사라는 두 주체가 함께 자율적으로 다스려 나간다는 의미다. 일본 특유의 “와(和)”라고나 할까. 일본의 노사관계는 일본 특유의 가족 개념인 ‘이에(家)’ 개념과 관계가 있다. 이에는 단순한 혈연 집단이 아니다. 가부장을 우두머리로 해서 상하관계로 구성되는 위계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가부장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X의 아들, X의 아내, X의 부하 등. 과거 한국의 호적 제도는 바로 이 일본의 이에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에는 국가 단위로도 확대된다. 그러면 일본 특유의 봉건적 정치질서가 만들어진다. 쇼군을 주군으로 섬기는 사무라이들의 주종관계적 조직으로서의 국가. 이제 회사도 이에의 연장으로 간주된다. 사장은 아버지이고 직원은 자녀가 된다. 직원은 아버지인 사장에게 충성하고, 사장은 자녀인 직원을 보호한다.

반면 한국은 ‘분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분쟁이란 갈라져서 싸운다는 뜻이다. 서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안 좋은 일이니 예방하고 다스려 해소해야 하는 대상이다. 분쟁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노동관계를 바라보는 치안적 시각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반대로 ‘쟁의’는 현실의 갈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더 나은 규칙을 창조하는 민주주의적 과정으로 삼는 개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박제성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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