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강주룡

지금도 고공농성은 계속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의 고공농성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대로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의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고공농성, 원직복직·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서울 강남역 사거리 CCTV 철탑에 오른 삼성 해고자 김용희의 고공농성, 해고자 복직·노조 기획탄압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응급센터 14층 옥상에 오른 영남대의료원 박문진·송영숙의 고공농성 등.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하늘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본이나 정권의 조기 탄압, 봉쇄를 피하고 시간을 벌어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지지·연대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 자본측을 압박해 절박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함이다. 지상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도 해도 안 될 때 마지막으로 공중을 선택하는 처절한 투쟁방법이 고공농성 아닌가.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

이 땅에 노동자의 고공농성투쟁이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수탈이 가속화되던 일제강점기부터다. 그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록에 있는 최초 고공농성은 임금삭감 철회를 요구하며 평양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지도자 강주룡의 고공농성 1인 시위다. 1931년 5월29일 새벽, 무명천 밧줄을 타고 5미터 을밀대 지붕 위에 가까스로 오르고 날이 밝아 오자 산책 나온 평양시민들에게 그녀는 “무산자의 단결과 고주(雇主)의 무리를 질타하는 연설”을 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남편과 같이 서간도 독립군 생활

강주룡은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14세까지 고향에서 살다가 부모를 따라 서간도로 이주했다. 20세 때 통화현의 최전빈이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다섯 살 연하의 나이였다. 21세 때 남편과 같이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대한통의부를 거쳐 참의부의 1중대장 겸 참의장을 맡았던 백광운(白狂雲) 독립군부대에 들어가 약 6~7개월 활동했다. “거추장스러워 귀찮으니 집에 가 있으라는 남편 말에 따라 시댁으로 돌아왔다. 5~6개월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곧바로 달려갔으나 그날 밤 숨졌다”고 전해지는데 전사인지 병사인지, 아니면 백광운처럼 당시 독립군 파쟁으로 인한 희생인지 기록이 없다.

강주룡은 1924년 서간도에서 다시 평안남도 사리원으로 돌아와 1년쯤 살다가 1926년 평양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친정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집안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투쟁에 적극 참가해 선진노동자·활동가로 성장했다. 독립군 생활로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강주룡이 노동자생활과 노동운동을 통해 철저한 계급의식까지 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투쟁 참가

강주룡이 참가한 1930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 상황은 이러했다. 8월6일 평양 대동고무 노동자가 최초로 파업을 시작하고 다음날에는 시내 10여개 고무공장에서 1천400여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을 일으켰다. 8월9일에는 파업대오가 1천900여명이 되고 8월10일 노동자대회를 개최해 임금인하 반대, 단체계약권, 산전산후 유급휴가 등 20여개 요구사항을 공장주에게 전달했다. 일제와 공장주들은 파업 참가 노동자 전원의 해고를 선언하고 새로운 노동자를 모집하는 한편 조만식 선생을 조정자로 공장주와의 타협을 설득했다. 그런데 일부 간부들이 일경의 위협에 굴복해 조정안에 직권조인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8월18일 대회를 소집, 전권대표 불신임을 결의하자 일경이 강경파를 체포했다. 노동자들은 항의시위로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마침내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폭동으로 발전해 공장을 점거했는데, 여성노동자들이 그 선두에 섰다. 폭동은 고양돼 8월25~26일 3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일경의 폭압을 뚫고 평양고무공장·동양고무공장·세창고무공장을 점거·파괴했다. 평양시민과 전국의 노동자는 평양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1929년 1월부터 3개월간 원산총파업투쟁에 이은 1930년 33일간의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투쟁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독점자본의 위기를 전가하기 위해 조선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가중되던 시기에 일제와 예속자본가·개량주의자에 반대하는 전국 노동자계급 의식과 단결과 투쟁을 한층 높였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주도

이러한 투쟁을 통해 단련된 강주룡이 1931년 5월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사측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제일 먼저 임금 삭감을 들고나왔다. 같은해 5월16일 사측이 일방적으로 임금삭감을 알리자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하 반대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평양고무공업동업회 소속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 쟁의를 지켜보면서 임금삭감을 강행할 작정이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른 고무공장 2천300여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5월28일, 파업투쟁 12일이 지났는데도 사측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투쟁 강도를 높여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사측이 노동자 49명 전원해고를 협박해도 굴하지 않자 한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구입해 새벽에 을밀대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목을 매어 자본측의 횡포와 노동자의 정당한 뜻을 세상에 알리자고 생각했으나, 을밀대가 눈에 들어와 ‘옳다. 죽더라도 저 위에 올라가 우리가 싸우는 뜻과 평원공장주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죽더라도 을밀대 위에서 외치고 죽자’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한 귀퉁이 너머로 던졌다. 광목 한쪽을 기둥에 묶고 뒤편으로 늘어진 광목에 매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친 몸에 깜박 잠이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 보니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을밀대 앞마당에 몰려와 지붕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웬 여자가 무슨 사연으로 저 위에 올라가 앉아 있을까 궁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강주룡은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각오를 밝혔다. 연설을 듣던 한 예수교 장로는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외쳤던 내용이 신문에도 간단히 실렸다.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보다 자세히 알려졌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왔다. 뒤쪽에서 사다리를 놓고 몰래 올라가 완강히 버티는 강주룡을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했다. 평양경찰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5월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쟁의가 해결되기 전에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밥 한술 뜨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검속시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했다.

사측이 직공을 새로 모집해 공장을 돌리려고 해서 강주룡이 풀려나 힘을 얻은 노동자들은 공장 담을 넘어 공장점거투쟁을 벌였다. 이때 안병식(23)·오양도(27)·고도실(18)·최용덕(28)이 다시 잡혀 들어갔다가 58시간 단식투쟁으로 버티다 6월3일 저녁에 풀려났다. 6월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했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 하고 따졌다.

6월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사측이 임금을 깎겠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됐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전원채용은 이뤄 내지 못했다.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나눠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쟁의가 매듭지어졌다. 6월9일 강주룡은 평양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됐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한 9·18 사변 약 3개월 전의 일이다. 조선 땅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 수탈하던 때다.

평양지역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강주룡은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돼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19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이라 병원조차 가 보지 못하고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13일 오후 3시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른두 살 한창 나이에 치열하게 살았던 짧은 삶을 마쳤다. 8월15일 남녀 노동자 100여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노동자의 총파업투쟁과 농민들의 춘황·추수투쟁이라는 대중적 진출을 바탕으로 만주일대에서 항일유격대가 편성되고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던 때의 일이다.

강주룡은 잠시 무장독립단체에도 참여했고 평범한 노동자에서 선진적 노동자로,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장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당당한 여성이자 노동자로 떨쳐나섰으며 조국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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