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얼마 전 몇몇 노조활동가들과 함께 일본의 전노련공제 관계자를 만났다. 참고로 일본의 노동조합 총연합단체는 크게 연합(렌고)·전노련·전노협 세 개가 있다. 전노련공제는 전노련에서 운영하는 공제회다. 일행 중 한 분이 한국 노동조합간부들과 교류가 많았을 텐데 노동공제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았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공제회에 대해서는 누구에게서도 질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공제회를 알려고 온 한국의 노조활동가들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한국의 노조활동가들에게 노동공제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 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한국에서는 노동공제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노동조합의 사업계획이나 보고서 그 어디에도 공제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노동조합에서 공제사업을 하는 곳이 일본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인접국이기 때문에 경험 공유가 그만큼 쉬울 수 있으므로 일본 공제사업의 의미와 현황을 한국의 노조 활동가들에게 전달했으면, 한국 노조활동가들이 그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 봤을 것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하긴 자존심 강한 한국 노동운동가들에게 일본 노동운동의 이념적 노선에 대한 파악 정도를 넘어 구체적인 사업을 세밀하게 살펴보라는 건 어림없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다. 일본 노동운동가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실패를 반성하며 역동적인 한국 노동운동에 부러움을 표시하고 큰 행사가 있으면 방문하는 형국인 것을 보면 그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내가 의아해하는 눈치라고 표현한 것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노동공제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 말은 반만 진실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노동조합이 성진의 부두노동조합이었다면,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배경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노동공제는 한국의 노동운동에서는 비어 있는 영역이라고 알려 줬다. 표정은 마치 ‘아니 쌀 없이 어떻게 밥을 짓고, 산소 없이 어떻게 숨을 쉬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공제사업은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사업이고, 어찌 보면 노동조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숨통이 트이기 전까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은행 문은 아예 출입조차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계급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로를 구제하자는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노동금고와 노동공제였으므로 그들에게는 노동공제가 노동조합활동의 출발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렌고를 기반으로 하는 전노제(전국노동조합공제회)의 규모가 워낙 커져 국민공제라는 기치를 내걸 정도가 됐고, 전노련공제 또한 월 납부금이 6억엔 규모로 커졌지만 지금까지도 자주복지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왜 공제사업을 하는지를 묻는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불만과 요구가 있어서 모임이 형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모임 속에서 불만과 요구가 탄생하는 것인지는 마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와 같은 관계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고장 영국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대항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주 들르는 술집에서 상호부조 모임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노조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니까 최초의 노동조합은 공제조합이었던 셈이다.

흔히 노조를 요구와 교섭의 대상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노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요구 없는 단결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단결 없는 요구 역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교섭과 투쟁이 노동조합 본령의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생활 영역에서 조합원들의 요구를 실현하는 일 역시 그만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생활 영역은 훨씬 더 넓고 오래간다. 공제의 경우 하나의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여전히 관계가 유지되는, 그래서 노동운동과의 고리가 이어지는 사업이다. 고정된 사업장 없이 이뤄지는 노동이 점점 더 많아지는 이 시기에는 특히 더 필요한 일이다. 창의는 옛 지혜 속에서 발생한다. 노동공제는 노동운동의 오래된 미래다.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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