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마드리드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두어 시간을 달려 도착한 남부의 중심도시 세비야. 기차역을 나서 올드타운으로 들어서면 주렁주렁 오렌지를 달고 있는 가로수들이 먼저 여행자들의 눈인사를 받는다. 나무마다 저렇게 가득 덜렁거리도록 있는 걸 보면 맛대가리가 아주 없거나, 벌금이 아주 세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는 속물적인 의심병은 어쩔 수가 없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장도 볼 겸 세비야에서 꼭 해야 할 일도 처리할 겸 서둘러 길을 나섰다. 세비야에서는 앞뒤 잴 것 없이 플라멩코(flamenco) 공연을 꼭 볼 작정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플라멩코 한 번 못 봤다고 하면 어디 가서 스페인 여행했다는 명함을 내밀기 수월치 않은 탓에…. 여행을 하면 할수록 눈과 마음이 넓어지기는커녕 속물병만 깊어 가는 건 무슨 일인지. 관광객들이 주된 손님이라서 그런지 플라멩코 공연들은 대부분 저녁 식사와 함께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여러 공연 중에서 밥을 안 먹으면서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걸로 찾다 플라멩코 박물관의 저녁 공연이 딱이다 싶어 예약을 마쳤다.

뿌듯한 마음으로 광장을 돌아 숙소로 향하는 길. 세비야 성당 근처에 왔을 때 성당을 둘러 가며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틈에 갇히고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후비고 들어갔더니, 이젠 아예 경찰이 길을 막아서 버린다. 경찰들 손짓을 눈치로 때려잡으니 지나가려면 저 뒤로 돌아가라는 것 같다. 하아~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터라 당은 떨어질 만큼 떨어져 있는데 이런 시련을 겪게 될 줄이야. 떨어지던 당이 이제는 바닥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다.

구시렁구시렁 투덜대는 내 앞으로 신나게 풍악을 울리며 옛 군대 복장을 한 행렬이 지나간다. 이어서 얼굴을 짙은 갈색으로 칠하고, 아랍인 복장을 한 무리가 말을 타고 등장하자 군중의 환호성이 높아진다. 저마다 ‘풋 유어 핸즈 업!’ 손을 머리 위로 들고 뭐라고 경쟁적으로 소리를 질러 대자 말을 탄 아랍인들이 반응을 보인다. 말을 탄 이들이 저마다 안고 있던 광주리 안에서 꺼내든 사탕을 사정없이 구경꾼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사탕에 무슨 금테라도 두른 듯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줍겠다고 덤벼 대는 이들로 난장이 벌어진다. 이 행렬의 정체는 ‘Three Kings Day’(동방박사의 날)를 기념하는 행렬이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동방박사의 날이지만 이곳에서는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우리로 따지면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을 합친 날이라고 한다. 이곳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양말을 걸지 않고 이날을 기다려 선물을 받는다고 한다. 어쩐지 낮에 거리 곳곳에서 선물 상자를 든 아이들이 돌아다니더라니. 아랍인 변장을 한 이들이 던진 사탕은 예수를 축복했던 동방박사들이 세비야의 아이들에게도 축복을 준다는 의미였나 보다. 축제는 다음날이 더 성대했다. 다음날 밤에는 동네마다 저마다의 콘셉트로 분장한 가장행렬 차량 수십 대가 도시를 한 바퀴 도는 엄청난 퍼레이드가 펼쳐졌으니까. 일부러 축제일에 맞춰서 여행 계획을 짜지 않고서는 이런 경험을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어찌 보면 여행의 묘미가 바로 이런 얻어걸림 아니겠는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나도 축복 좀 받아 보겠다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탕을 꽤 주워 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비야에서는 진짜 운수 좋은 날이 될 줄 알았다.

다음날 저녁, 미리 가서 플라멩코 CD도 사 둘 겸 오후 6시가 갓 넘었을 즈음 플라멩코 박물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래? 박물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작렬하는 소리냐 싶어 황망해 하는 중에 철문에 붙어 있는 종이 쪼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대문자로 또박또박 적힌 내 이름 석자. “축제 때문에 공연이 없는 날인데 실수로 예약을 받았습니다. 내일 오면 공연을 보여 주거나 환불을 해 주겠습니다”는 친절한 사과 메모였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힌 메모. 하지만 이 일을 어쩌나. 난 내일 아침 첫 버스로 떠나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그 메모 밑에 이렇게 쓰고 쓸쓸히 숙소로 돌아서고 말았다.

“카드로 긁은 거니까 환불해 주쇼!”

결국 다음날 한 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 오고 간 끝에 환불을 받을 수 있었고 플라멩코 공연도 그라나다에서 볼 수 있었으니 뜻한 바는 다 이룬 셈이 됐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예상할 수 없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소매치기나 좀도둑 걱정에 잔뜩 긴장해서 품 안에 물건을 꽁꽁 싸매고 다니다가, 어이없게 버스나 지하철에서 졸다가 급히 내리면서 자리에 놓고 내리기도 한다. 여행자나 외국인에 대한 편견에 얼굴 붉힐 일이 생겼다가도, 다음날 아침 어느 사람 좋은 현지인의 호의에 기분이 사르르 풀리기도 하는 게 여행이다. 여행의 운수란 건 이처럼 돌고 돌게 마련이다. 그러니 운이 좋을 때, 그 기분을 최고로 즐겨서 저장해 둬야 나쁜 운과 마주쳤을 때 멘탈이 털리는 일을 막아 낼 수가 있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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