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1920년 9월 유럽 시찰 중 영국을 방문한 조소앙 선생.<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최고의 사상가이자 이론가

조소앙(1887~1958)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처음 세워질 때 국무원 비서장이었고, 1940년 이후 충칭 임시정부 시절에는 외교부장으로서 김구에 이어 사실상 2인자 역할을 했다.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삼균주의를 제창했다. 삼균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개인·민족·국가 간 균등에 기초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사회사상이다.

조소앙은 자신이 제창한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중요 정책과 이념을 제시했고, 수많은 문건을 작성했다. 여러 차례 바뀐 임시정부 헌법들과 한국독립당(한독당)·한국국민당 등 임시정부 여당의 정강과 정책, 당의와 당강,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주요 성명서와 발표문·선전문·포고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임정 문건이 없을 정도다.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의 총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1941년 발표된 ‘건국강령’은 그가 기초한 여러 문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제헌헌법에는 건국강령의 주요 내용과 뼈대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조소앙은 ‘한국 헌법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작성한 임시정부의 주요 문건들은 대한민국 헌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파주에서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다. 소앙(素昻)은 필명이던 것이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1902년 15세 때 성균관에 입학해 신채호를 만났다.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돼 최남선·최린 등과 함께 도쿄 제일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가 유력한 가문의 자손들이 택하던 관료의 길을 접고 일본 유학을 택한 것은 형 조용하의 영향이 컸다.

조소앙보다 5년 연상이었던 조용하는 대한제국의 촉망받는 관료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조용하는 1913년 만주에서 이상룡·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 활동에 관계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단·한인협회·<신한민보> 등에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 사망했다.

조소앙 집안은 조용하·조소앙을 비롯해 동생 조용수·조용한·조용제·조시원, 조소앙의 두 아들 조시제와 조인제, 조시원의 딸 조순옥과 그의 남편 안춘생, 조시원의 며느리 이순승 등 11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했다. 그의 집안은 손에 꼽을 정도의 대단한 독립운동 명문가지만, 6·25 전쟁 때 그가 납북되면서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심하게 압박받았다.

임시정부 활동의 기초가 된 삼균주의

조소앙은 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됐으나 6월에는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됐다. 김규식과 조소앙 등은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8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 촉구 결의라는 성과를 거뒀다.

조소앙은 1921년 5월 베이징에 도착할 때까지 2년여에 걸쳐 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영국·독일·발틱 3국과 혁명러시아 등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혔다. 이때 유럽 사민주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했는데, 그의 사상 정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27년 국내에서 신간회가 출범하면서 해외에서는 유일당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그러나 좌우연합은 실현되지 않았다. 1930년 2월 이동녕·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당됐다. 조소앙은 한독당 당의와 당강을 작성했는데, 이때 삼균주의가 공식적으로 반영됐다.

당의에서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해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민주국가를 건설해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한다”고 했다. 당강에서는 ‘보통선거를 통한 참정권·기본권 보장, 토지 및 생산기관의 국유화로 생활의 평등화, 국비의무교육에 의한 교육권의 평등화, 민족자결과 국제평등, 세계일가의 조성’ 등을 천명했다.

이러한 진보적인 내용들은 임시정부 정책에 그대로 수용됐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맥을 잇는 재건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통합한국독립당, 나아가 충칭의 좌우연합정부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외교부장 조소앙 정부승인을 위한 활동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대를 마감하고 8년여에 걸친 장정시기를 겪은 뒤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안착한다. 1940년 10월 4차 개헌을 통해 김구 주석 체제가 정비됐고, 조소앙은 외무부장으로 선출됐다.

충칭 시기 임정 활동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가 외교활동인데 그 선두에 외교부장 조소앙이 있었다. 임정은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을 통해 광복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 냈고, 중국 정부와 미국·영국 등 연합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전개했다. 외교부장 조소앙은 1945년 3월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 일제에 대한 엄정한 처리 등을 요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참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끝내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임시정부가 이룬 외교 성과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은 장제스를 통해 카이로 선언에 한국 독립을 언급하는 조항을 넣도록 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남북협상파의 대표인물이 된 조소앙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최동오 등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1948년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38선을 넘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됐고, 북한 또한 단독정부를 세우면서 한반도 분단은 현실이 됐다.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과 미군 철수, 친일파 처벌을 외치다 분단세력·친일세력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조소앙은 1950년 5월30일 2대 총선에 출마해 조병옥을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조병옥을 3만4천표 대 1만3천400표로 압도하며 전국 최다 득표를 했다. 조소앙은 김구가 암살로 사라진 상황에서 남북협상파·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당선은 남북협상파의 부활을 의미했다. 민중들은 전쟁과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었다. 좌우분열·남북분단이 아니라 좌우연합·남북통일을 말하고 있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조소앙 외에도 안재홍(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무소속)·원세훈(민족자주연맹)·장건상(무소속) 등 남북협상파가 다수 당선됐다. 남북협상·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적 지지였다. 그러나 선거 후 채 한 달도 안 돼 6·25가 터졌다. 이들 중간파·남북협상파는 대거 납북되고 말았다.

조소앙을 비롯해 안재홍·최동오·원세훈·윤기섭 등 6·25 전쟁 때 납북된 중간파 인물들은 북에서 한국독립당 재건을 추진했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북한 정권이 이들의 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등 이념대결을 넘어선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조소앙은 1958년 9월10일 병으로 타계했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조소앙은 지금 우리들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완성하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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