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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 뉴질랜드 여행의 끝판왕
▲ 최재훈 여행작가

길을 잃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 두 줄기 빛 앞에 보이는 건 막다른 길뿐이고, 개 몇 마리가 사방에서 보름달 밤의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시간은 벌써 자정 언저리라 더 운전하는 것도 무리다. 일단 차를 세우고 배부터 채우기로 한다. 다행히 나는 지금 먹고 자고 씻을 수 있는 시설이 다 갖춰진 4인승 캠핑카를 타고 있다. 게다가 뉴질랜드의 여름은 새벽 4시만 넘으면 날이 밝기 시작하니,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잠시 눈 좀 붙이고 나서 다시 길을 찾아 나서면 그만이다. 그렇게 몇 시간 보낸 뒤의 이른 아침. 운전석 위 벙커 침대에서 기어 나와 밖으로 나가니 이건 웬걸! 맙소사다! 차가 멈춰 선 곳에서 10미터쯤 앞으로 나아가 보니 절벽을 따라 마치 고래 등처럼 생긴 해안선이 이어져 있었다. 뉴질랜드 남섬의 터널 비치(Tunnel Beach). 막다른 길 정도로 생각했는데, 시리도록 부신 햇살과 파도, 커다란 언덕 아래 바위를 뚫어 바다로 내려갈 수 있게 만든 비밀의 통로가 있는 해안절벽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니!

뉴질랜드 캠핑카 여행에는 이런 매력이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들어선 대로 뜻밖에 숨은 보물들과 만나게 된다. 물론 내비게이션과 구글 지도가 등장하면서 이런 난데없는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신 여유 있게 차를 몰며 자연의 백화점 뉴질랜드가 가진 매력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게 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캠핑카 여행의 맛은 속도를 늦춰야만 맛볼 수 있다. 도착지를 정해 놓고-그것도 시속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네댓 시간 달릴 곳을-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까지 간다는 과한 목적의식에 사로잡히면 ‘과정’은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인생이나 여행이나 다를 것이 없다. 속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목적지를 뺀 나머지 것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만다. 십중팔구 운전석 옆에 켜 두고 있을 내비게이션이나 구글 지도의 화살표와 거리 표시가 운전자를 목표에 더 꽂히게 만들고 있을 거다. 그렇게 내달려 목표를 이루고 나면 잠시의 쾌감 뒤에 남는 것은 긴 운전 끝의 어깨 결림과 불편한 잠자리에 대한 투정뿐. 여행의 속도를 올리고 싶다면 승용차 여행이나 패키지여행 쪽을 선택하는 편이 옳다.

사실 캠핑카 여행은 꽤나 불편한 여행이다. 아무리 차 안 잠자리가 좋다 한들 호텔과 같은 제대로 된 숙박업소보다 나을 리 없고, 부엌이나 화장실 공간도 좁아터졌기 때문이다. 식수대와 화장실에서 나온 하수 처리도 귀찮지만 이틀에 한 번은 해 줘야 한다. 게다가 싸지도 않다. 캠핑카와 캠핑카의 숙소인 홀리데이파크 숙박료·기름값까지 치면 웬만한 여행비용은 나온다. 잘 먹는 것에 목숨 걸기 시작하면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불편함을 즐길 작정이 아니라면 애초에 캠핑카 여행은 피하는 게 좋다. 또 하나, 열흘 안쪽의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면 역시 캠핑카를 뒤로 물려 두는 게 좋다. 어느 여행자나 시간이 짧아지면 마음은 급해지기 마련이고 여행의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으니까.

캠핑카 여행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계획을 짜 두기보다 큰 그림만 그리고 그 안의 작은 그림과 세밀한 묘사는 그날그날, 순간순간의 느낌과 선택에 맡겨 두는 쪽이 어울린다. 계획은 그저 불안함을 덜기 위한 의식 정도의 의미만 두면 된다.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금 무얼 하고 싶은지 묻고 그 답에 따르는 게 진리다. 또 하나, 운전을 할 때는 최대한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한다. 곳곳에 세워진 뷰포인트와 트레킹 코스 안내판을 게임 아이템 찾듯이 찾아서 되도록 많이 들러 봐야 하니까. 일행 중 누구 하나라도 들러 보자고 하면 건너뛰지 않도록 하자. 장담하건대 소수의 의견을 존중했을 때 얼마나 환상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될지니. 다수결 민주주의에 지친 영혼들에 휴식이 있으리라. 흐흐흐. 가볍게 얘기했지만 여행자들 사이의 욕망을 조율하는 문제는 여행 최대의 난제다. 적게는 두 명, 많게는 다섯 명까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다 보니 원하는 게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답은 없다. 다만 좀 피곤하고 번거로워지더라도 최대한 다양성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게 답이라면 유일한 답이다. 민주주의나 여행이나 다양성을 살리면서 효율적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다양한 욕망이 섞인 여행이 더 풍성해지고, 더 많이 얘기하고, 더 행복해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 합쳐서 3주 정도면 바쁘게, 4주 정도면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2주 이하라면 남과 북 중 한쪽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북섬은 화산이 만들어 낸 풍경이, 남섬은 빙하와 파도가 만들어 낸 풍경이 아름답다. 뉴질랜드 관광청 사이트를 여행하듯이 둘러보는 것도 언젠가 가게 될 뉴질랜드를 꿈꾸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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