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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③] 나는 독거노인입니다장순애씨

눈을 감는다고 현실의 어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외면한 결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다. 어떨 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누군가 표현처럼 노동자 마디 굵은 손가락을 만져 보자. 노동현장의 차별과 고통을 직시하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2018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을 보내왔다. 대상 1편과 우수상 4편을 소개한다.<편집자>


여자들이 냄비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노동자이니 4대 보험 가입이 가능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녀들은 예전에 식모 또는 파출부로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75세 독거노인인 제가 그녀들의 외침에 발을 멈춘 것은 60년 전 저도 식모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라북도 부안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조그맣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굶주림만 겨우 면하고 오빠 둘을 빼고는 학교 다닐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열다섯 되던 해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3개월 후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5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동네 사람에 의해 누군가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남의집살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기 봐주고, 청소·빨래·밥하고 집주인이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월급은 밥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거로 대신했습니다. 어린 탓에 손이 야무지지 못하다는 야단을 자주 받아서인지 이집 저집을 전전했습니다. 19세에 아는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에서도 남의집살이를 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시집가면 이것보다는 괜찮을 텐데’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결혼은 남의집살이를 벗어날 탈출구였습니다.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아는 사람 소개로 결혼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시집을 와 보니 살림이 더 못했습니다. 남편은 수도 기술자였습니다. 곡괭이를 메고 다니면서 땅을 팠습니다. 당시에는 땅 파는 기계가 없었습니다. 겨울에 언 땅을 파는 날에는 힘들어서인지 술을 먹고 들어왔습니다. 술 먹은 다음 날에는 일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삼사일씩 일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땅 파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야. 날 풀리면 성실히 일하겠지’라며 남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봄이 와도 남편은 술은 가까이하고 일은 멀리했습니다. 이러다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는커녕 굶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위로 딸 둘, 아래로 아들 둘을 뒀습니다. 자식들은 네 살, 세 살 터울입니다. 큰딸이 중학교 2학년, 막내아들이 네 살 때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떡을 담은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팔았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팔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마흔두 살에 혈압으로 죽었습니다. 저는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이 일곱 살, 큰딸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입니다. 제가 너무 못 배웠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식들은 가르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주변 사람 얘기를 듣고 떡장사를 그만두고, 옷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보따리에 옷을 싸들고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습니다. 떡을 팔던 방식과 같았습니다. 새벽에 팔 옷을 사러 도매시장에 가면 식구들 아침은 열세 살 둘째 딸이 준비했습니다. 장사할 때 밥을 먹은 날보다 종일 굶고 일한 적이 많습니다. 밥 사 먹는 돈이 아까웠습니다. 저녁 집에 올 때까지 굶어서 “사세요”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죽자 살자 일해도 자식 네 명 키우기가 벅찼습니다. 돈은 모아 놨다가 등록금 내고, 또 모아 놨다가 등록금 내면 남는 게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비를 못 내면 선생님이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영세민 신청을 하려고 동사무소에 찾아갔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뭐하려고 자식을 가르치냐.” 창피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 같으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사정이 워낙 다급해서 굽신굽신했습니다. 영세민이 됐지만, 배급을 몇 번 타 먹지 못했습니다. 쌀과 보리 5킬로그램을 배급해 줬는데, 며칠에 타러 오라고 하면 일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대신 갔지만, 대신이라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영세민을 포기했습니다.

보따리 장사를 그만두고 지하철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2호선 개통식 하기 전이었습니다. 월급은 8만원이었습니다. 기지창으로 들어오는 차량의 내·외부를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격일제로 근무했습니다. 사회보험은 없었습니다. 관리소장이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만 챙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 힘든 일을 시키고, 더 오래 일하게 했습니다. 경우에 안 맞는다고 따졌더니 그만두라고 해서 7년간의 청소 일을 그만뒀습니다.

큰아들 중학교에 찾아갔습니다. 창피한데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러 간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기는 배급은 안 나오지만, 등록금은 나갈 수 있습니다”며 잘 찾아오셨다며 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어렵사리 중학교를 마치게 된 큰아들 졸업식장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앞으로 나가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들은 남들 다 받는 졸업앨범을 받지 못했습니다. 앨범비를 못 냈기 때문입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습니다. 아들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학원 청소를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큰아들이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입학금만 대 주면 나머지 학비는 내가 어떻게든 벌어서 댈게요.” 어떻게든 대 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입학금을 줄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50대 중반에 공사판 일을 했습니다.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전기설비를 하는 일입니다. 막노동판에서 유일한 여자였습니다. 현장에서 전기 일은 노가다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전공이라고 불렀습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체력이 약했습니다. 일하러 공사장 정문에 도착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오던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지.’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가 옷 갈아입고 커피 한잔 마시면 생기가 돌았습니다. 첫차 타고 나가서 깜깜해서 손에 장비가 잡히지 않을 때까지 일했습니다. 60만원을 받고 10년간 일했습니다. 이렇게 일한 덕에 아이 넷을 고등학교 졸업시켰습니다. 둘째 딸이 취업해서 첫 월급 받던 날 바바리코트를 선물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습니다. 차려입고 나갈 곳이 없었습니다. 옷걸이에 걸어 놓고 바라만 봤습니다. 두 딸은 한결같이 3·4개월 정도만 직장을 다녔습니다. 그리곤 곧 결혼했습니다. 돈 벌어서 동생들 학비·생활비를 보탤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짐을 다시 혼자 지게 됐습니다. 딸들이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스무 살에 결혼을 탈출구로 여겼듯이 딸들도 혹시 지긋지긋한 집을 탈출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을까?

나이가 많다고 공사판에서 쫓겨났습니다. 65세였습니다. 구청에서 공공근로를 잠깐 하고, 빌딩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71세까지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좀 쉬라고, 애들 다 컸는데 용돈 받아가며 살아도 되지 않겠냐고 합니다.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큰딸과 막내아들이 인연을 끊었습니다. 큰딸은 결혼하고 나서 발길을 끊었습니다. 마흔 살 전에는 효자였던 막내아들의 변화는 충격이었습니다. 유일한 동거인인 막내아들은 집에 오면 입을 닫았습니다. 제가 말을 걸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걸핏하면 화를 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 좋다, 싫다 안 하고 벙어리처럼 지냈습니다. 몇 년간 너무 힘들었습니다. 막내아들은 화가 나면 발을 쿵쿵거리고 주먹을 쥐고 벽을 쳤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러다 화가 풀리면 빵·과자를 사다가 말없이 나한테 휙 던져 놓고 나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던져 놓고 간 빵·과자는 먹지 않고 아들 방에 갖다 놓았습니다. 막내아들은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전화가 왔습니다.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엄마, 이제 난 엄마 아들 아니니깐 전화하지 마세요.” 나만 믿고 살라던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막내한테는 서운함 없습니다. 큰딸에게는 많이 서운합니다. 엄마가 고생한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고등학교는 나와야 대학 나온 남자를 바라볼 것 아니냐”며 딸들을 우선으로 공부시켰는데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잠시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자식들을 사랑이 아니라 의무로 키웠습니다. 새벽에 나갔다 밤에 들어오고. 그렇게 키웠는데 애들이 정이 있겠습니까? 같이 뒹굴고 뒤집어지고 그래야 하는데, 부모가 정을 주고 그래야 하는데 벌어먹고 벌어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랑으로 못 키운 업보입니다. 저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71세부터 노인 일자리를 4년째 하고 있습니다. 노인 일자리에서 받는 27만원과 기초연금 25만원은 방 한 칸, 부엌 하나인 무허가 사글세 집에서 사는 독거노인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복지가 늘어난 덕입니다.

60년 전 남의집살이를 하던 나를, 60년 후 냄비를 들고 나온 여자들은 식모·파출부가 아닌 가정관리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53년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 11조1항은 가사노동자를 근기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산재보험·고용보험 적용에서도 모두 제외됩니다. 일하다 다쳐도 자비를 들여 치료할 수밖에 없습니다. 휴식시간이나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해도 ‘견디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루아침에 잘려도 실업급여나 퇴직금은 나오지 않습니다. 임금이 밀려도 고용노동부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노동자와는 달리 민사소송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억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하지만 누구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고 누구는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지 못한 65년간, 노동자가 아닌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사노동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60년 전 내가 겪은 고통을 후배들이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고 기원합니다.

* 이 글은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이 장순애씨의 구술을 토대로 기록했다.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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