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한다는 의미는 한국에서도 노동자가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비준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과 조건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한국의 국제노동외교가 질적 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ILO는 한국이 핵심협약을 비준하기를 바란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한 호텔에서 이상헌(51·사진) ILO 고용정책국장을 만났다. 그는 11~12일 이틀간 서울시가 주최한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 참석차 방한했다. 이번 포럼에서 ‘일의 불평등과 유니온시티’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 ILO에서 어떻게 일하게 됐나.

“2000년 5월부터 ILO에서 일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노동경제학을 수료한 뒤였다. ILO 연구용역을 맡은 게 인연이 됐다. 정책과 현실, 국제사정을 접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싶었다. 2년 계획으로 갔는데 지금까지 왔다. 연구국장 대행과 사무차장 정책특보에 이어 1년 전 고용정책국장을 맡게 됐다. 고용정책국은 전 세계적 고용정책을 조율하는 일을 한다.”

“공공일자리 창출 무서워할 필요 없어”

-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서울시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에 참석했는데.

“서울포럼에서 하는 일은 의미가 크다. 노동·고용정책은 국가 차원에서 다루는데, 도시가 거대화되면서 도시단위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하지만 먼저 나서 논의하자는 데가 없었는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나선 것이다. 우리는 무릎을 쳤다. ILO의 카운터파트는 국가라서 도시단위 문제에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서울시가 직접 한다니까 환영할 수밖에.”

올해 서울포럼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는 한국 노사정의 역할이 컸다. 거기에 집중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도시단위에서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약했다. 공감대를 얻는 데 의의가 있었다. 올해는 여러 도시단위 이야기를 듣고 공통의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감대를 형성한 도시가 꽤 있더라. 내년에는 좋은 일자리 도시협의체(DWCN·Decent Work City Network)가 출범하니까 참여 도시가 더 늘어날 것이다. 뉴욕에서도 직접 행사를 할까 생각하는 듯했다. 유럽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도시에 권하고 싶다고 했다.”

- 기조강연에서 일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 공공영역이 개입하고 취약노동계층 보호를 위해 유니온시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의 중요성을 적극 인정하고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등 정책이 좀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 배경이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일자리 창출에 개입하면 민간부문을 위축시킨다고 하는데 그건 기우다. 현재 상황을 안일하게 판단하는 것 같다. 지금은 민간 일자리 창출여력이 약해져 있다. 돌봄과 환경 등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분야가 많다. 공적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투자하고 좋은 일자리를 주도하면 민간도 움직인다. 민간투자를 몰아내는 게 아니라 견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공공일자리 창출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플랫폼 노동 세계적 문제, 해법 찾아야”

ILO는 내년에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일의 미래 위원회(The Future of Work Commission)를 만들어 변화하는 노동세계와 일자리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내년 초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 올해 서울포럼에서는 플랫폼 노동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해법이 있나.

“ILO에서도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아직 뚜렷한 해법은 없다. 다만 이번 포럼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 줬다. 데이비드 와일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노동법 보호 대상을 불안정 고용형태로 확장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뉴욕은 프리랜서권익보호조례 제정이라는 독자적 해법을 모색했다. 그런 범주의 노동자들이 아직은 소수지만 미래에는 늘어날 것이다. 노동법에서 정한 노동의 범주가 좁아지는 것이다. 노동법 체계가 유효한지 근본적 질문에 부닥친다. 이른바 ‘무빙 타깃’을 쏘는 셈이다. 노동시장은 아주 빨리 변하는데 우리는 오래된 총을 갖고 계속 쏘아 댄다. 맞으면 좋지만 내일 쏘면 안 맞을 수 있다. 근본적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 한국에선 얼마 전 카풀 공유서비스에 반대하며 택시노동자가 분신해 사망했다.

“각 나라마다 이런 문제로 갈등이 크다. 이탈리아나 영국에서도 공유택시 문제로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기도 했다. 한국도 그런 과정에 있다. 아직 해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해대표성과 제도가 중요하다.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죽는 경우가 없다. 죽는다는 것은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절박해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데 공론화할 공간이 없다. 있더라도 좁다. 잘 모를 때는 급하게 도입할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더디 갔으면 한다.”

“소득주도 성장정책 폐기 논쟁 의미 없어”

-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각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란에 대한 의견은.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한국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별로 한 게 없다. 소득주도 성장은 임금정책이 아니다. 경제정책이다. 경제 성과를 내면서 분배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성장을 유지하는 경제정책 프레임이다. 분배를 개선하려면 기업 경쟁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대기업이 다 먹는 구조에서 중소기업이 아무리 임금을 높이려고 해도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공정경제가 중요하다. 대·중소기업과 원·하청 관계를 정상화해서 생산성 향상의 효과를 대기업이 뺏어 가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최저임금을 인상한다 한들 저임금 노동자 임금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

이 국장은 다시 한 번 아쉬움을 표했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한 모든 경제정책을 동시에 가동했어야 했는데 최저임금 하나만 치고 나가면서 오해를 불렀다는 비판이다.

“동시에 이뤄졌어야 했다. 공정경제를 통해 중소기업·프랜차이즈·자영업자 경영개선 조치를 하면서 임금인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열고, 그 뒤 협상 능력이 없는 저임금 노동자를 위해 최저임금을 적극 활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바로 던진 게 최저임금이다. 다른 경제정책과 같이 갔으면 서로 숨통을 트이게 했을 텐데 최저임금만 제일 앞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다 보니 소득주도 성장이 최저임금을 올리는 거라고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다른 정책이 따라오지 않으니까 최저임금 부작용이 생기고, 최저임금만 홀로 외롭게 두들겨 맞는다. 그게 아쉽다.”

- 지금이라도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정상궤도로 올리는 방법이 있겠나.

“소득주도 성장정책 폐기 논쟁은 하등 의미가 없다. 당초 분배를 개선하면서 경제성장을 하자는 게 아이디어였다면, 이건 모든 정책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연구개발(R&D) 투자 없이 성장하겠다? 말도 안 된다. 혁신성장이란 게 특별할 게 있나. 새 정부는 특별히 분배에 신경을 쓰겠다는 것이지, 성장을 저해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게 애초 소득주도 성장 아이디어다. 각 정부부처가 힘을 합쳐 큰 플랜을 짜고 같이 추진해야 하는 정책이다. 지금 소득주도 성장정책 폐기 논쟁은 아카데믹한 논쟁이지 생산적 논쟁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논쟁보다 구체적인 정책을 어떻게 가져가고 배치할지가 중요하다.”

“어떤 방식이든 핵심협약 비준 바란다”

- 한국 정부는 그간 수차례 국제사회에 ILO 핵심협약 가입을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았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 정부는 여러 번 약속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한국에서도 노동자가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의미다. 자유롭게 노조를 만들고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혁약 비준이란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비준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과 조건이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진다. 현재 한국 정부는 확실한 의지를 갖고 있는 듯하다. 비준이 되길 바란다.”

- ILO 핵심협약 비준 방식을 놓고 논란이 있다. 관련 입법을 먼저 하고 비준할지, 비준을 한 뒤 입법할지 여부에 관한 내용이다.

“비준 방식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다. 둘 다 가능하다. 국내 정치적 과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비준한다. 처음 비준 과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후속 과정이 달라진다. 다 갖춰서 하겠다는 선 입법시 후속 과정이 간단해지는 것이고, 선 비준시 입법 과정에 부담이 커져 후속 과정이 길어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ILO는 한국이 핵심협약을 비준하기를 바란다.”

- 내년이면 ILO가 창립한 지 100주년이 된다. 한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노사정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공감대를 이뤄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기를 바란다. 내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ILO 총회에 문재인 대통령이 노사정 대표와 특별기를 타고 왔으면 한다. 그리고 총회장에서 한국 노동에 대한 비전을 선언한다면 어떨까.”

정기훈 기자


“ILO 핵심협약 비준하면 한국 노동외교 질적 도약”

이 국장은 한국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한국이 국제노동외교에서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한국 국제노동외교는 수세적이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 등으로 각종 권고를 받았다. 그러니 국제노동외교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어젠다를 주도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대통령이 총회 연설을 통해 비전을 제시한다면 국제노동외교에서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다.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지난달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같은 노동정책 후퇴로 사회적 대화가 흔들리는 형국이다.

“지난해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이 방한했을 때 두 가지를 강조했다. 우선 ILO 핵심협약 비준이다. 결사의 자유를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노사정 대화 복원을 주문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경사노위 출범은 의미가 있다. 환영한다. ILO도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동안 ILO 전문가들이 여러 번 방한해 기술적 지원을 했다. 앞으로 노사정이 다 참석하고 의견이 잘 조율돼서 실질적으로 많은 논의를 했으면 한다. 대통령도 경사노위에 힘을 실어 준다고 했지 않나. 다뤄야 할 의제가 너무 많다. 빨리 달려도 1~2년 이내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주제도 많다. 노사정 대화가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불렀다. 사회적 대화에 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불신이 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개선과 변화를 맥시멈으로 굳혀서 가야 한다. 이른바 진지전이라고 할까. 한꺼번에 욕심을 내서 너무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 참호를 파고 굳히기를 반복했으면 한다. 나중에 어려운 상황이 오면 참호에서 버티면 되지만 참호 없이 100미터를 나가 버리면 고스란히 돌아와야 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정책적·제도적 개선을 위한 진지를 굳건히 지켰으면 한다.”

“사회적 대화 통해 소득안정성 확보·일자리 창출”

- 사회적 대화에서 어떤 의제를 논의해야 할까.

“핵심 어젠다는 소득안정성 확보와 일자리 창출이다.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일자리가 생기고 없어지는 주기가 빨라진다. 소득안정성 확보가 중요한 이유다. 민간에서는 일자리가 안 만들어지고 있다. 노사정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드는 논의를 해야 한다. 큰 정부 혹은 작은 정부 논쟁은 지금 의미가 없다. 정부가 간섭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적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일자리 공간을 열어 줘야 민간도 투자를 더 하고 고용을 창출한다. 선순환적 메커니즘을 어떻게 만들지 논의해야 한다. 여성·장애인을 포함한 취약계층 고용창출 등 논의할 게 너무 많다. 심각하게 빨리 고민해야 한다. 너무 더디다.”

- ILO는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어떤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나.

“지난 100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19년에는 일의 세계에서 사회적 정의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ILO 1호 협약이 ‘8시간 노동’이다. 1944년 필라델피아선언에서는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노동의 상품화를 피하기 위한 정책적 조치를 만들어 왔다. 1969년 ILO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렇게 100주년을 맞았는데 그저 기념파티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지, 아니면 고장난 총을 들고 무빙 타깃을 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전 세계 노동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할 절호의 기회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세계 노사정 합의가 이뤄진다면 ILO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아 ILO 100주년 선언문을 채택하려고 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를 담아 강한 메시지를 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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