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윤희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올해 초 한 제조업 사업장에서 업무적합성 평가 요청이 들어왔다. 업무적합성 평가란 질병으로 아프거나 산업재해로 다친 노동자가 업무를 이어 갈 수 있는지 전문의사가 평가하는 것이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환자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환자가 일했던 작업장 환경을 살핀다. 그리고 둘의 지속가능성과 전후맥락을 살피고 다음 네 가지 중 하나로 최종 결론을 내린다. 즉 △현재 조건하에서 현재업무 수행이 가능한지 △일정 조건하에서 현재업무가 가능한지 △한시적으로 현재업무 수행이 불가능한지 △영구적으로 현재업무 수행이 불가능한지 중 하나다. 예상할 수 있지만 대부분 두 번째로 귀결된다.

나에게 지정된 노동자는 심근경색과 심정지까지 겪었던 59세 남자였다. 그는 2017년 10월 회사 뒤쪽에서 동료들과 족구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급히 응급실로 가서 막힌 심혈관을 뚫고 간신히 살아났다. 축구선수 경력이 있었던 환자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고 회사는 그의 복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 또다시 쓰러질까 봐 두려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전문가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업무적합성 평가라는 절차를 알고 요청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일면 산재로 이어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배제하고자 미리 배수진을 치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회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이 아픈 노동자를 관리했고, 전문가가 하라는 대로 따라했다는 객관적인 서류를 남겨 놓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이제껏 이런 상황에서 환자의 업무 가능성을 결정하는 사람은 환자 치료를 담당한 임상의사였다. 공장의사나 산업보건의사의 의견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부터 사업장 보건을 관리하는 대행업체들의 의무사항에 업무적합성 평가 항목이 들어가면서 이 절차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모든 의무사항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화되기 마련이다. 의미와 본질은 사라지고 그저 의무사항을 이행했다는 흔적 남기기가 돼 버리곤 한다. 특히 보건관리대행업체들의 고용노동부 기관평가 항목에 이게 속하면서 지난해 한 해 동안 이 일이 그저 점수 따기를 위한 서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작성하나 마나 한 서류들이 난무했다. 대표적으로 소음성 난청 환자들의 경우 그간 구두로 “귀마개를 착용하고 일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던 것이 “일정 조건(귀마개 착용)하에서 업무 가능”이라는 평가 서류로 변경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심근경색 사례는 업무적합성 평가가 제대로 이뤄진 드문 사례였다. 실제로 심근경색이라는 위중한 질환을 앓고 멀쩡하게 회복되는 경우도 드물었고, 회복됐다 하더라도 회사가 복귀를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사업장의 경우도 실상 힘 있는 노조가 있었기에 복귀가 가능했다. 나는 노조와 회사의 협조하에 철저하게 매뉴얼대로 평가를 시행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이후 글에 남기도록 하겠다.

‘일할 수 있다’는 임상의사의 소견서가 있는데도 왜 굳이 이런 작업을 이중으로 하냐고 누군가는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임상의사 소견은 물론 중요하다. 특히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소견을 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대부분 환자들은 다시 일을 하길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임상의사에게 실상보다 훨씬 강도가 낮은 것으로 보고한다. 의사 역시 웬만하면 환자의 생계를 유지해 주고 싶어 하기에 환자의 말을 토대로 업무가 가능하다는 소견을 낸다. 업무적합성 평가의 핵심 축인 업무 평가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임상의사들은 ‘환자’만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사업장 작업환경과 업무 특성, 근무시간, 교대제 유무, 노동강도 등 환자 건강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은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두로 환자가 보고하는 일은 말했다시피 새 발의 피고,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이기도 하다. 산업보건의사의 전문성이 여기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업무적합성 평가가 공식화되기 시작한 지 2년이 돼 간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산업보건 영역으로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를 포함한 산업보건의사들은 임상의사 소견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직접 발로 뛰어 현장을 파악하고, 본질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업무가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것인가. 건강을 해치지 않게 하려면 사업장에 어떤 조건들을 내걸 것인가. 그때는 노동자 편에도, 사업주 편에도 서지 않고 오로지 하나만을 바라보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바로 ‘일하는 사람의 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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