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발제문을 읽고 가슴이 답답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2018년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가을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노동부문 발제문이었다. ‘한국 사회 특권구조와 법,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헌법·사법·토지공개념·교육·경제 등의 부문과 함께 노동에 관해서는 ‘한국사회 특권구조와 노동 : 근로계약과 도급계약의 긴장관계’를 조승현 방송통신대 교수(법학)가 발표했고, 이날 나는 토론자로 참여해 토론했다. 발제문을 읽고서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4차 산업이니, 21세기 디지털산업이니 하면서 노동과 그에 기반을 둔 노동법이 사라질 것처럼 서비스계약에 관한 유럽의 논의를 소개하더니 “불평등이 지양되는 노동자적 관점에서의 노동개혁이 돼야” 한다고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는 고용의 유연화, 비정규 근로의 일반화, 프리랜서의 증가, 규제완화의 방향 등 노동·노동시장의 유연화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 그걸 노동자적 관점에서의 노동개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 이 나라에서 그동안 사용자 자본과 그를 편드는 언론 및 권력이 수도 없이 말해 왔던, 사용자 자본을 위한 노동시장 개혁방안이었다. 노동과 노동자라는 말조차 사라지게 할 듯한 4차 산업, 21세기 디지털산업의 광고 홍수에 노동자권리를 위한 법의 본질을 망각하고서 쓴 글이라고 나는 읽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답답할 만큼 발제문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내가 썼던 토론문을 그대로 옮겨서라도 재차 비판해야 한다며 꾹꾹 눌러서 이 글을 쓰고 있다.

2. 발제문에서 그는 근로계약을 서비스계약으로 해소시키는 4차 산업, 21세기 디지털산업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처럼 인식하고서 고용보호 등 노동자 권리를 중시하는 법은 더는 존립할 수 없는 것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근로계약관계로 규율되지 않는 우버택시 같은 사업이 전체 산업을 지배하는 세상이 닥쳐오고 있고, 이런 세상에서는 더는 기존 노동법이 규율하는 근로관계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질적인 생산, 경제의 변화와 함께 사회규범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규범 연구자들은 추상화된 규범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탓에 그 규범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의 물적부문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 정확하지 않은 현실진단을 하고서 자신의 연구대상인 규범을 그에 조응시키겠다고 접근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 노동법에서도 이 세상이 조만간 저 세상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하면서 기존법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폐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의하는 학자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논의를 읽어 보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존 노동법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거나, 노동법을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약화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일쑤다. 발제문도 그러했다. 하지만 발제와는 달리 우버로 대표되는 서비스계약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극히 낮다. 더구나 장차 그와 같은 서비스계약이 종전의 많은 사업에서 대체한다고 해서 사용자의 지시에 따른 노무 제공을 하는 근로계약관계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른 사업 등 영역에서 근로자의 노무 제공을 필요로 할 수가 있으며(우버 회사에서도 고용돼 고객과 택시 사이에 우버서비스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있고, 우버와 달리 카카오택시처럼 기존 택시사업질서 틀 내에서 이뤄지는 디지털산업도 있다), 노동법은 그 영역에서 여전히 규율하게 될 것이다. 로봇으로 자동화하더라도 로봇 감가상각분의 가치가 상품에 이전될 뿐 새로운 가치의 증식은 노동을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하지 않고서 이 세상에서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가능하지 않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오게 될지도 확실하지 않은 세상을 두고서 그 세상에서는 고용 등 노동자권리를 중시하는 노동법 질서는 존립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니 발제자는 ‘근로계약과 도급계약의 긴장관계’에 관해서 발표하고 있었지만, 그 긴장관계는 현실적이지 못했다.

3.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발제문에서 조 교수는 우버와 같은 “노동의 서비스화 현상은 앞으로 모든 산업영역에서 무한히 확장될 가능성이 높고, 이미 디지털 산업의 발달로 생겨나는 새로운 노동형태에 대한 법적 쟁점은 국내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며 포스코의 생산관리시스템(MES)을 통한 작업수행을 예로 들어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미 한국의 노동형태도 변화하고 있다”며 4차 산업, 21세기 디지털산업의 시대에 따른 노동(법)의 변화를 묻고 있었다. 포스코 MES시스템에 관해서도 디지털화된 노동세계의 대표적 사례로서 발제문에서 여러 차례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10·12·16면 등). 우리 법원이 제철소 사내하청업체 근로에 관해 MES시스템에 주목해 파견근로라고 최초로 판결한 것은 현대제철 순천공장(옛 현대하이스코)에 관해서였다(광주지법 순천지원 2016.2.18. 선고 2011가합5128 판결 등). 이 판결이 있고 나서 1심에서 파견근로로 인정하지 않았던 포스코 사내하청에 관해서도 광주고법에서 MES에 주목해 파견근로로 인정해 판결했다. 그런데 현대제철·포스코의 사내하청은 우버와 승객, 차량운전자 사이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우버와는 달리 전통적인 근로계약관계 아래서 단지 생산체계가 전산화돼 있을 뿐이다. 전산화된 MES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원청 현대제철, 사내하청업체, 현대제철소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사내하청 근로자가 있어 내연강판 등 생산을 했을 것이다.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한 원청 현대제철의 작업 지시, 작업 수행 및 작업 결과 점검에 관해 원청 관리자가 그 작업현장에서 일일이 하던 것을 MES시스템에 의해 상당수 대체돼 진행됐던 것이다. MES는 원청 사용자가 원청 사업을 위해 노무를 제공하는 사내하청 근로자 등의 작업 수행을 관리하는 생산시스템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MES시스템 아래 사내하청 근로가 파견근로인지 여부에 관한 “판단은 쉽지가 않다”는 발제자의 견해는(12면) 도대체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디지털플랫폼·스마트팩토리로 공장이 자동화·전산화·지능화되더라도 사내하청 근로자를 사용한다면 여전히 파견근로가 문제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발제자는 “필요한 인력을 팩토바 플랫폼을 운영하는 전문적인 업체에 의뢰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며 “이를 불법파견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12·13면), 원청 사용자를 위한 효율 때문에 파견근로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노동법의 존재이유를 무시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4. 이상과 같이 4차 산업, 21세기 디지털시대에 관해서 말하고서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내지 정규직과의 차별금지를 위한 한국의 비정규직법(파견법·기간제법 등), 해고 제한 등 고용 보호, 임금 등 노동자권리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이 오히려 비정규직 보호에 취약하고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르면 방향은 고용·임금 등 노동자권리를 보호하는 노동법을 개폐해서 사용자가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발제자는 “디지털산업 패러다임에서 노동의 유연화는 필연적”이고,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지 않고 오히려 경직된 노동패러다임-경쟁력 상실-일자리공급의 축소-실업의 만연이라는 필연적 수순을 밝게되며, 노동의 유연화가 노동자의 수입을 악화시키는 것도 아니다”고 썼다(17~19면). 하지만 조 교수의 견해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 노동법이 노동자의 고용·임금 보호를 위해서 경직돼 있다는 인식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평균 근속기간·고용형태, 비정규직 및 특수고용직 비율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 비교해 보지 않고서 이 나라 노동자가 과도하게 고용에 관해 노동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징계해고 및 일반해고·정리해고 등에 관해서 정당해야 한다며 사용자의 해고를 규제하는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실제 어떠한 경우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고 고용이 경직돼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명예퇴직·희망퇴직·권고사직·의원면직 등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법상 해고를 회피하고, 공장폐쇄·폐업·구조조정 등 사용자는 해고 제한의 노동법을 회피하는 길이 이 나라 사용자들에겐 널려 있다. 무엇보다도 정규직이 과보호돼 있어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받는다는 인식에 나는 절망을 느꼈다. 오늘 이 세상, 이 나라가 사용자 자본을 위한 효율만을 말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 교수의 발제문을 읽으면서 나는, 지난달 6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는 아니다”고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운운하며 귀족노동자·귀족노조로 비난하며 추진하던 박근혜 정권의 노동시장 구조개혁 방안이 떠올랐다. 정녕 오늘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토론하기가 어려운 시대인 것인가.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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