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엄마가 영화표를 한 장 줬다. 노동조합에서 나온 거라고 했다. 어느 공장 식당에서 밥 짓는 일 했던 엄마는 으레 그 회사 직원이었고, 노조 조합원이었다. 알게 뭐람, 공짜라면 그저 좋아 혼자 극장으로 내달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종종 버거웠다. 돌아와선 재밌었다고만, 엄마에게 말했다. 자율적이지 않던 고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 구석진 뒷자리에 앉아 책을 봤다. 눈초리 매섭던 감독 선생님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툭툭 쳤다.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니었으니 철렁했다. 당구봉 들어 책을 살핀 선생님은 독후감을 써 오라고 했다. 그게 뭐라고 6개월을 엉덩이 맞아 가며 미루고 버티다 종이 한 장을 채워 냈다. 수업 시간에 앞자리 나가 읊었다. <전태일 평전>이었다. 오래전 일인데 내게는 여전한 일이다. 엄마는 해마다 이맘때면 내게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노동자대회는 자주 길에서 격렬했으니 카메라 든 자식 걱정이 컸을 테다. 지난해와 올해엔 연락이 없었다. 배추 뽑고 절이느라 바빴다고, 손목이며 허리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엄마는 푸념했다. 빌딩 청소용역 일을 진작에 그만두고도 늙은 엄마 일이 끝없다. 또 하나의 노동자대회가 끝나는 대로 내려가 김장을 돕겠다니 힘든데 오지 말란다. 바쁜데 어딜 오냐고. 그런데 아빠도 이젠 다 늙어 무 뽑고 뭐 하느라 아프단다. 올 거면 조심해서 오란다. 엄마 좋아하는 달달한 크림빵을 사 들고 가야겠다. 전태일 48주기 추도식이 열린 모란공원 이소선 여사 묘소에 크림빵이 올랐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열사의 외침이 현재진행형이라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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