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아프지 않은 날보다 아픈 날이 더 많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해도 등허리에 둘러붙인 파스 몇 장에 의지하고 나선 날도 셀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일하고 그만두는 친구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요즘 젊은 것들의 끈기 없음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 역시도 생계를 유지할 다른 방법만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뛰쳐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냉동탑차로 입고되는 냉동수입축산물 상자는 1천 박스가 족히 넘었고, 그것들을 지게차로 부려서 내릴 수 있도록 팰릿 위에 쌓고, 상자들이 실려 나가도록 지게차가 부려 놓은 팰릿에서 탑차로 실어 쌓는 것이 그의 일이다. 10킬로그램에서 20킬로그램까지 차갑고 묵직한 상자를 하루에 2천여개, 25톤을 넘게 나르는 일이다. 250킬로그램도 아닌 2만5천킬로그램을 오로지 자신의 근력으로 들어 나르는 일이다!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이러저런 사연으로 나이 사십이 넘어 시작한 일을 18년간 환갑을 바라볼 때까지 하고 있게 될 줄도 짐작하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의 몸만이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노동자들은 파스 몇 장, 진통제 몇 알, 침 한두 방, 통증 주사 등에 의지하며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팔이 올라가지 않거나 몸을 굽히기도 힘든 요통이 찾아오면 두려움에 휩싸인다. 아파서 일을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전문병원을 찾고 수십 만원하는 MRI 사진을 찍고 디스크라거나 힘줄이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는다. 비용부담이 만만찮은 비급여도 마다하기 어렵다. 증상이 조금만 나아지면 일을 해야 한다. 근력과 신체기능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더라도 늘어나는 의료비를 감당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일을 하다 보니 재발하고 결국 악화되는 골병의 악순환인 것이다.

아파도 일해야 했고, 병가나 산재보상 신청은 생각지도 못하고 출근을 못하면 사직서를 써야만 하는 줄 알았던 노동자들은 골병이 들어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산재보상을 신청하는 것이다. 용하게 산재가 승인되더라도 적절하고 충분한 재활복귀가 동반하지 않은 산재 요양 후 다시 일해야만 한다면 골병은 더 심한 상태로 노동자의 몸을 잠식할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일거리는 더 불안정하거나 질이 낮아지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골병과 가난의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개입해야 할 지점은 너무도 많다. 산재 진입장벽도 낮춰야 하고, 산재 인정절차는 간소화하되 전문성과 신뢰성은 높여야 한다. 예방·보상·재활·직장복귀가 유기적으로 통합돼야 한다. 갈 길이 멀다. 한꺼번에 성취될 일도 아니며 하나씩 풀어 나갈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근로복지공단 소속병원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직업재활 및 직장복귀 시범 프로그램은 새로운 시도이자 접근이다.

업무관련성평가 특진은 업무상질병으로 산재보상을 신청한 노동자들의 재해조사를 직업환경의학전문의와 산업위생전문가가 초기부터 개입해 조사하고, 임상 각과들과 다학제적 협진을 수행해 전문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시범사업이다. 향후 표준화와 사후 검정을 통해서 신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한 문제는 절차의 간소화다. 업무관련성평가 특진을 통해 앞서 오십대 노동자 사연을 듣게 된 것은 산재보상 신청을 한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제도가 원활하게 운영되기에는 아직 공공의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특히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어쨌든 생계 문제에 직면한 산재노동자들에게는 행정처리 기간의 단축과 간소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전문성과 신뢰성이 높다 하더라도 최대한 신속하게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근골격계질환을 중심으로 산재 인정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한 전문 정책연구가 진행 중이다. 산재판정 자료를 바탕으로 특정 업무나 직종에서 직업력과 일정한 신체부담 기준을 충족하는 사례들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사 과정을 생략하고 승인하는 당연인정기준을 설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기준에 합의를 이루고, 산재노동자들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업무관련성평가 특진은 전문성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당연인정기준을 확대하고 조정하는 데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특정기간 이상 일을 한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근골격계질환을 당연히 산재로 인정해 줘야 할 만큼 위험한 일터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일터의 조건을 개선하고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사업장 현장방문을 통한 직무분석을 시행하고, 직장복귀에 필요한 현장 평가와 개선방안 제시를 비롯해 다양한 지원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하고 준비하고 있으니 이 역시 반가운 시도다.

근로복지공단 소속병원을 중심으로 정형외과·신경외과 등 임상 각과에서 적정하고도 유익한 근골격계 치료의 본보기를 보이고, 그동안 재활의학과를 중심으로 일군 직업재활치료 분야의 성취를 더하고, 거기에 새로운 시도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병원 진료실에서부터 노동의 현장까지, 산재 진입 전 단계부터 치료와 재활복귀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전달체계가 공공의 영역에서 자리 잡기를 희망해 본다. 더불어 새로운 시도의 기획에서부터 제도가 안착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이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근로복지공단 병원의 시도가 노동자들의 골병의 악순환을 끊는 단초가 되기를 빈다. 바로 그 공공의 영역에서 함께 하고 있는 필자의 쑥스러운 자기 응원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