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취임했다. 지난 2일 대법원 본관 중앙홀에서 이동원·노정희와 함께 취임식을 갖고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칼럼에 쓰면서도 조심스럽다. 기대는 세상 어떤 산보다 높아서 노동기본권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는 세상이라도 올 것인 양 내 심장이 뛰고 있다. 대법관 후보로 추천돼 취임하기까지 괜한 시빗거리로 트집 잡힐까 봐 마치 내가 당사자이기라도 한 듯 조심스러웠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고 마침내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어떤 친분관계로 그가 대법관이 되기를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대법원 홈페이지 뉴스(2018년 8월2일자)에서 밝힌 대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1988년부터 약 30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관되게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의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으며, 다양한 헌법·노동법 등 관련 사건에서의 변론 활동을 통해 자유·평등을 비롯한 민주사회의 가치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던” 그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대법원의 이런 평가가 올바른 것임을 잘 알기에 그가 대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2. 이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은 이 모양으로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저절로 이렇게 된 세상이 아닌 것이다. 이 나라에서 노동의 권리와 지위가 이 지경인 것은 이 지경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노동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왔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권리와 노동기본권에 관한 법이 노동자를 사용자 자본에 복종해야 하는 노예로 만들어 왔다. 이런 나라를 두고서 노동자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식으로 여긴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노동자를 기망하는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우리 법원은 그 법을 구체적으로 해석·집행하면서 노동자를 사용자에 대등하게 맞서는 주체로 세워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최고법원으로서 대법원은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노동기본권 보장을 외면하는 판결을 하기 일쑤였다. ‘실정’의 법이 그래서라는 변명은 이 나라 대법원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노동자를 절망에 빠트렸던 많은 판결은 국회가 입법한 법을 노동자권리와 노동기본권을 외면하는 해석으로 선고된 것이었다. 각종 수당과 상여금 등의 임금을 산입범위에서 제외시켰던 통상임금 판결, 노동제에 무지한 근로시간 판결,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주인 사용자 처분에 복종하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취업규칙 판결, 단순 노무제공 거부인 파업조차도 형사처벌 등 면책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쟁의행위 판결 등 대법원 판결에서 노동법은 노동자권리와 노동기본권을 위한 법이라고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감히 그렇다고 말하겠다. 그동안 20년 가까이 내가 겪어 온 바로는 그도 그렇다고 대답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제 취임한 ‘대법관’ 김선수도 그렇다고 말할 것인가.

3. 그는 취임식에서 "대법관으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노동자가 포함돼 있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속하는 지위에 있기에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대법관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것이겠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노동자가 이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자이기 때문에 법이 보호해야 하는가. 사용자들의 권리와 지위는 법이 선언한다. 법이 보호하는 것이다. 재산권이든 뭐든 이 세상에서 권리는 법이 선언하고 보호한다. 법이 가진 자로 선언하고, 법이 못 가진 자로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우리의 법이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로 선언된 자이기도 하다. 근로계약을 통해 사용자와 대등한 천부의 인권을 가진 인간을 사용자에 복종하는 ‘근로자’로 추락시킨다. ‘근로자’인 그는 사용자와 결코 대등할 수가 없는 자다. 이런 노동자를 두고 사용자에 대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로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선수 대법관 취임사에서 나는 노동자도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다짐을 읽는다. 그런데 간혹 이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와 구분해 귀족노동자 운운하는 말을 들어 왔다.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를 일컫는 말인데 '땡깡파업'에 '철밥통'이라며 비난의 말로 쓰고 있다. 귀족노동자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에서 제외시키고 구별 짓기 위한 말이다. 즉 귀족노동자는 감히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지 못하고, 오히려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에 대해 사회적 강자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이런 개념구별에 의한다면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와 지위를 위한 법, 노동법은 둘로 쪼개져 그 존재이유를 잃게 된다. 노동법은 대기업 및 공공기관 정규직과 중소·영세 노동자, 비정규직의 것으로 달리 제정돼 시행돼야 할 것이고, 나아가 다시 보다 열악한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 점점 더 쪼개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근로계약을 통해 사용자 자본의 사업을 위해 그에 복종해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노동자인 것이다. 그 처지가 다르다고 해도, 보다 나은 처지라고 해도 노동자라서 보호해야 하는 법이 바로 노동법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사용자 자본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법, 그것이 노동법인 것이고, 그가 귀족노동자로 불리워도 노동자인 한 노동법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사회적 약자를 귀족노동자 운운하며 노동자와 노동법을 쪼개는 말로 여기지 마라고 덧붙이고 싶다.

4. 계속해서 언론은 김선수 대법관이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보수야당 소속 의원들로부터 지적받은 편향성 논란에 대해 “대법관 직무를 수행하며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정치적 고려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닌 공무원으로,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으로서 당연한 다짐의 말이겠다(대한민국헌법 7조·103조 참조). 이런 중립의 다짐이 대법관으로서 노동법을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서의 의미를 거세하고서 판결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노동법은 노동자의 권리, 노동기본권을 위한 법이다. 노동자를 위한 편파성을 놓치는 순간, 노동법은 민법 등 일반 민사법으로 추락하고 만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수많은 노동판결에서 추락이 있었다. 기업사정 등을 운운하면서 사용자를 위한 노동법의 추락이 있었다. 더 이상 추락이 없으려면 노동법 존재이유대로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기업사정 등 사용자를 위한 고려를 일절 하지 않고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이렇게 명시적인 다짐을 취임사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김선수는 대법관으로서 노동법 추락에서 벗어난 판결을 하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5. 이렇게 쓰고 나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 같아 모조리 지우고 싶다.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일 테니 말이다. 차라리 이러저러한 찬사와 기대를 쏟아 냈으면 좋았겠다고 후회도 된다. 그리고 이전처럼 변호사로서 이러저런 일을 함께하기 어렵게 된 것이 무척 아쉽다. 노동법 토론을 할 때면 노동의 관점을 놓지 않는 그와 함께한다는 것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됐다. 하지만 대법관 김선수에 대한 기대는 내게 이런 잡다한 감정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선수 대법관의 시대, 법원 판결이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의 존재이유를 선언하는 시대이기를 기대해 본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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