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를 마친 남북 선수들이 포옹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여기 이상한 경기가 있다. 흔한 “이겨라”는 구호도 없다. 상대편이 골을 넣었는데 제 팀이 역전골을 넣은 듯 환호한다. 상대편 선수와 부딪혔는데도 그냥 웃는다. 선수 하나 다쳐 넘어지면 우리팀 상대팀 할 거 없이 우르르 달려간다. 걱정스런 얼굴로 괜찮은지 살피고 일으켜 세워 안아 준다.

섭씨 35도 폭염이 기승을 떨친 날.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땀으로 젖는 날씨. 그럼에도 전후반 60분간 운동장을 뛰는 선수와 땡볕에서 응원하는 3만여 관중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경기. 그 이상한 경기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3년 만에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다.
 

▲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참가한 남북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인사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조선직총 2015년 평양대회 압승, 2018년은?

오후 4시 경기에 맞춰 양대 노총 조합원들과 서울시민들이 월드컵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아이 손을 잡은 가족들이 많았다.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땀으로 샤워한 관중들은 웃음을 머금었다. 한일전을 방불케 하는 응원전이 경기 전부터 펼쳐졌다. 응원구호는 하나였다. 3만여 관중은 응원봉을 두드리며 “우리는 하나”를 외쳤다.

북측 대표단과 남북 주석단이 경기장에 입장하자 관중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남과 북 노동자 선수단이 입장할 때에는 월드컵경기장이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날 경기는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장과 홍광효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통일부위원장, 서종수 한국노총 서울본부 의장의 개막선언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둘로 쪼갤 수 없는 하나, 남과 북 노동자들이 자주통일의 한마음으로 모였다”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남과 북, 북과 남 노동자들의 통일 의지를 모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경기는 한국노총과 조선직총 건설팀, 민주노총과 조선직총 경공업팀 순으로 열렸다. 201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당시 조선직총은 양대 노총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양대 노총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조선직총 담배연합팀이 한국노총에 2대 0으로 이겼고, 조선직총 수도총국팀이 민주노총에 6대 0으로 승리했다.

이날 경기는 양대 노총이 조선직총을 상대로 한 골이라도 넣을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경기장을 찾은 민주노총 조합원은 “어차피 또 6대 0으로 질 것”이라면서도 “경기 결과는 상관없다”고 너털웃음을 보였다.
 

▲ 응원 열기도, 날씨도 뜨거웠다. 통일축구서포터즈 회원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응원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조선직총 건설팀 강진혁 선수 2골 성공

한국노총팀과 조선직총 건설팀이 먼저 경기를 치렀다. 오후 4시50분 경기 시작과 동시에 양팀은 상대 골문까지 공을 몰아가 슛을 날렸지만 번번이 골키퍼에 막혔다. 전반 15분께 조선직총 선수가 프리킥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 골문을 벗어났다.

첫 골은 전반 21분께 조선직총 서대성 선수의 오른발에서 나왔다. 그는 오른발 슈팅으로 첫 골을 터트린 후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관중들은 응원봉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조선직총 건설팀은 한국노총팀을 몰아붙였다. 4분 후 강진혁 선수가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든 뒤 추가골로 연결시켰다. 한국노총팀은 곧바로 반격에 들어가 슛을 날렸지만 골기퍼 한원철 선수에 가로막혔다.

관중들은 더운 날씨에 경기를 뛰는 남북 노동자들을 향해 “힘내라”고 외치며 파도타기 응원에 나섰다. 득점에 실패한 한국노총팀에 “잘한다”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직총 건설팀은 후반 12분 세 번째 득점을 올렸다. 김진혁 선수의 패스를 받은 강진혁 선수가 주인공이었다. 강 선수는 이날 두 골을 성공시켰다.

경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선수들은 지쳐 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다.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외치는 관중들의 응원에 후반 22분 김선영 선수가 한국노총팀에 첫 골을 선사했다. 역전에는 실패했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상대팀 선수석으로 가서 인사하고 음료를 나눠 마셨다. 관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은 손을 들어 화답했다.
 

▲ 양대 노총 노동자 통일선봉대원들이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응원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부딪혀 넘어져도 웃는 남북 노동자 선수들

두 번째 경기는 민주노총팀과 조선직총 경공업팀이 치렀다. 심판이 경기시작 호루라기를 불자 공을 잡은 조선직총 경공업팀 선수들이 민주노총팀 골문으로 무섭게 공을 몰더니 1분도 안 돼 첫 골을 성공시켰다. 관중들은 계속된 경기에 지칠 법도 했지만 열렬히 응원했다.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땀범벅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부딪혀 넘어져도 웃었고, 골을 넣지 못해도 웃었다.

오후 6시45분 태클을 걸던 북한선수가 고통을 호소하며 넘어졌다. 남북 선수 모두가 모여 걱정하고 격려했다. 북한 선수들은 남한 선수석에, 남한 선수들은 북한 선수석에 뒤섞여 음료를 마셨다. 경공업팀의 김철성 선수가 발목 부상을 당하자 민주노총팀 선수가 경기장 밖까지 부축했다. 관중들은 선수들이 골을 성공시킬 때보다 남북 노동자 선수들이 넘어진 상대선수에게 손을 내밀고 부축하고 어깨동무를 할 때 가장 크게 환호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우리는 하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민주노총팀과 조선직총 경공업팀의 경기는 후반 13분 경공업팀 오정철 선수의 추가득점으로 끝이 났다. 조선직총이 2대 0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민주노총팀은 득점에 실패했지만 3년 전보다 나은 기량을 선보였다.

모든 경기가 끝난 뒤 양대 노총과 조선직총 선수들은 손에 손을 잡고 한반도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았다. 선수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관중들은 일어나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조선직총 경공업팀 김명균 선수는 경기가 끝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오늘 북과 남 노동자 축구팀이 힘차게 볼을 차며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오늘은 비록 작은 축구장에서 경기를 했지만 다음에는 통일의 큰 마당에서 볼을 찰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관중들은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난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경의선 타고> <평양에서 만나요> 같은 노래를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경기가 열리는 내내 한반도기가 경기장 중앙에 휘날렸다.

▲ 남북 선수들이 경기 후 한반도기를 흔들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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