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에어컨이 말썽을 일으켰다. 예전 아파트에 살 때 구매했던 작은 벽걸이 에어컨이다.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가지고 왔는데 소형 에어컨이라 거실에 설치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할 수 없이 안방 벽에 달아 놓았다. 이 에어컨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에어컨이 한창 필요할 때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주로 깊은 산이나 계곡 근처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과 캠핑을 하면서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10일 넘게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러니 집에서 에어컨을 찾을 일이 없었다.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여름휴가는 기약 없이 됐고 갑자기 찾아온 폭염은 나의 더위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더위에 약하지 않은 편인데 유독 94년의 기억만은 끔찍하다. 더위 역사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아니 빠질 수 없는 94년에 나는 신병훈련소 뙤약볕 아래서 유격훈련을 받았다. 그때 악몽이 에어컨을 더 빨리 찾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주 에어컨을 틀었는데 찬바람도 시원찮고 10분 정도 지나면 에어컨에서 물이 줄줄 떨어졌다. 지난해에도 이 현상으로 한번 서비스센터 도움을 받았는데 같은 현상이 재발한 것이다. 아내는 이참에 에어컨을 바꾸자고 했다. 아이들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안방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서 잤다. 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같이 자는 걸 거부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니 안방 벽걸이 에어컨으로는 아이들 방까지 시원한 바람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큰마음 먹고 거실용 에어컨을 구매하기로 했다. 마침 지인이 가전제품 영업을 담당하고 있어 가성비 좋은 모델로 구매는 어렵지 않게 했는데 문제는 설치기간이었다. 에어컨을 설치하는 데만 최소 1주일 이상 걸리고 그 1주일도 장담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올해 여름은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가정용 에어컨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올 여름 휴가를 반납했다고 한다. 나처럼 에어컨을 찾는 소비자가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창원에 있는 에어컨 생산라인은 하루 3시간씩 연장근무를 한다. 7월부터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지만, 이 공장은 탄력적근무제를 시행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7월부터 8월은 하루 3시간씩 연장근무를 하고 다음달은 연장근로를 줄여서 평균 주당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맞추기로 했다. 이 공장은 탄력적근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폭염으로 밀려드는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생산시간을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소비자는 이 여름이 다 지나서 에어컨을 받을지 모른다. 에어컨이 빨리 설치되기를 바라는 소비자가 에어컨을 생산하는 노동자에게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구조다. 전통적으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체제는 2가지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가동시간과 노동시간을 통합하는 방식과 가동시간과 노동시간을 분리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수요량과 생산능력 차이가 크지 않을 때 사용하고 후자는 수요량이 생산능력을 초과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수요량이 증가하면 생산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쉬운 방법은 교대조를 늘리는 것이다. 1교대에서 2교대로 늘리면 생산시간은 두 배 늘어나지만, 노동시간은 1교대 시간에서 멈추게 된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 이하인 국가에서는 가동시간과 노동시간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생산성은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에어컨처럼 계절마다 수요량 변동이 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에어컨은 이 여름이 지나면 수요는 뚝 떨어질 것이다. 일시적 수요 변동은 가동시간과 노동시간을 분리해서 대응하게 되면 사회적 부작용이 더 크다. 이럴 때는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탄력적근무제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제품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응집된 결과물이다. 이렇게 보면 소비자와 노동자는 시간의 공학관계에 있다. 소비자의 만족을 위해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강요할 수 없고 생산은 소비자의 수요를 외면할 수도 없다. 노동시간은 소비자와 노동자의 만족점이 최대치가 되도록 하는 과학의 과정으로 결정돼야 한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폭염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모든 노동자들께 감사드린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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