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내년 최저임금 법정 심의 기일이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출구 없는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포함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대통령 거부권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노동계는 "악법 중의 악법을 의결했다"며 대정부 투쟁을 예고했다. 노동계는 14일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 참석 대신 헌법재판소에 최저임금법 개정안 헌법소원을 낸다. 노정관계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게 됐다.

노동계 "최저임금법 죽었다"

정부는 지난 5일 오전 국무회의를 열고 최저임금법 산입범위를 대폭 확대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에 따라 내년 1월1일부터 최저임금 대비 정기상여금 25% 초과분과 복리후생비 7% 초과분이 최저임금에 포함된다. 산입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돼 2024년에는 상여금과 복리후생비 전체가 최저임금에 들어간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한 양대 노총은 반발했다. 국무회의가 열린 시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긴급 결의대회를 열었던 한국노총은 개정안 통과 후 "최저임금법이 죽고 노동자의 희망도 무너졌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과 노동존중 사회 실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선거용 헛말이 됐다"고 비난했다. 민주노총도 국무회의 직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완전히 뒤집은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 4년은 노동자를 반대편으로 내몰고 감당해야 할 4년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대 노총의 반발로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는 파행이 불가피하다. 당장 14일로 예정된 전원회의에 노동계는 불참한다. 대신 양대 노총 등 최저임금위 노동자위원 9명은 헌법재판소 앞에서 최저임금법 개정안 헌법소원 제기 기자회견을 연다. 노동자위원들은 같은날 회의를 열고 최저임금 관련 종합대응책을 논의한다.

8월5일 내년 최저임금을 고시해야 하는 만큼 최저임금 결정 시한의 마지노선은 7월20일께다. 최저임금법 17조(회의)에 따르면 노동자위원과 사용자위원 각각 3분의 1 이상이 출석해야 의결할 수 있다. 노동자위원이나 사용자위원이 2회 이상 불참할 경우 참석위원들로만 표결해 최저임금 인상률을 결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막판에 가면 노동자위원들이 결국 돌아오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한 노동자위원은 "일각에선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의에 참석해 (최저임금을) 많이 올려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나오지만, 산입범위가 엉망이 된 마당에 올해 1만원이나 1만5천원으로 올린들 그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고시를 앞두고 끌려 들어가듯 참여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노동계의 이 같은 판단은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과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동존중 사회 실현이라는 국정과제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노동자위원은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로 가닥 잡고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재고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다, 집권여당 원내대표는 앞장서서 사회적 대화를 파탄 내고 있다"며 "최저임금위 참여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할지 규정부터 재고해야 할 시점"이라고 비판했다.

국제사회도 주목, 가이 라이더 총장 "한국 상황 의외"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저임금 논란에 국제사회도 주목하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 참석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기조연설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여당이 주도해 대기업을 포함한 사용자를 달래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고 비판했다. 이성경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을 전하며 "최저임금 인상이 핵심인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폐기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며 "ILO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요청했다. 가이 라이더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과 고용·임금 등 철학을 긍정적으로 봤는데 의외"라며 "한국정부 대표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겠다"고 말했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같은날 고용노동부 기자단과 가진 인터뷰에서 "임금 결정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건 과정"이라며 "ILO가 노사정 3자 주의를 늘 강조하는 이유가 결정 과정에서 노사가 충분히 논의하고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할 때까지, 끝까지 해 보고 공통분모가 있을 때 법률 합의 등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한국에서) 좀 갑작스러운 면이 있지 않았나 아쉬운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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