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차입, 투명 경영, 참여 경영으로 "모두가 주인인 공장 만들 터"



2000년 4월 법원은 인천소재 경동산업의 퇴출을 결정했다. 당시 노조 비상대책위원을 맡고 있던 박선태씨는 기자에게 독백처럼 다짐을 했다. "두고 보십쇼. 절대로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1년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1년 뒤 정말로 그들이 해냈다. 기름 밥에 사출기, 용접기 밖에 만질 줄 모르던 경동산업노동자들이 무차입 경영에 월 매출 10억원, 순이익이 1억여원이나 되는 건실한 기업 (주)키친아트를 설립한 것이다.

경동산업노조의 역사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의 양식기 업체였던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월 200시간씩 잔업 철야를 하면서도 저임금에, 구사대와 다름없는 어용노조,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짓눌려왔다. '1년에 짤린 손가락이 한 트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산재로 쓰러진 이는 수를 헤아릴 수 없고, 89년 투쟁과정에서 두 명의 동료를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상처를 '한'으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주)키친아트를 설립한 것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대표이사는 노조 최성춘 위원장, 그리고 최위원장과 마치 한 몸처럼 팀웍을 이루는 노조 전 위원장 박선태씨(민주노총 인천본부 전 사무처장)가 상무이사다. 또 경동노동자들의 한, 그 한이 상처로 박혀 온몸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이종화씨. 89년 '9.4 사건'으로 온몸에 불이 붙어 전신3도 화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품질관리를 맡고 있다. 주주 288명은 모두 퇴출 당시 경동산업노조 조합원들. 이들은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출자 전환해 주주가 됐다. (주)키친아트는 노조가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갖는 '자주관리기업'이다.

* 적대관계에 있던 노사, 12년 뒤의 '아이러니'한 만남

지난 6월23일 토요일 오후 인천 송도비치호텔. (주)키친아트 창립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 왔다. 63년 경동산업 창사이래 사장을 맡았고 '산업재해의 왕국', '노조탄압의 왕국' 경동산업을 이끌었던 최경환 회장이 나타난 것이다. 89년 9월4일 대량징계 때 노동자들이 그렇게 만나려고 했어도 만날 수 없었던, 그리하여 경동산업노동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겼던 당시 사장, 최경환 회장. 당시 투쟁의 주역이었던 지금의 키친아트 경영진들과 12년만에 만난 것이다.

"지난 12년, 우리는 큰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 노사 당사자가 오늘 이 자리에 마주 앉았습니다. 제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원칙 없는 경영으로 회사의 근본이 뿌리 채 흔들리게 했던 회사관계자와 경영진을 배제하고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주)키친아트를 설립했습니다." 최성춘 대표의 인사에 답하듯 여든이 넘은 최경환 회장은 담담히 말했다. "회사 직원들과 관계자들에게 많은 심려와 피해를 끼친 데 죄송합니다." 12년만의 만남은 그렇게 키친아트의 발전을 기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망한 회사를 우량기업으로…노조의 역전 홈런

경동산업노조의 (주)키친아트 만들기는 지난해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96년, 그러니까 박선태씨 등이 6년만에 복직하여 노조위원장에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미 그 때부터 회사가 망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경동산업노조는 임단협 때마다 '채권에 대한 양도양수각서'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거의 두 달에 한번 꼴로 파업을 했다. 사무장이었던 최성춘씨가 위원장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

지난해 2월 주문도 끊어지고 생산도 중단됐다. 임금은 두달째 체불. 최악의 상황에서 노조는 전면파업을 벌였다. 최성춘대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파업 7일만에 채권에 대한 양도양수 구두 약속을 받아낸다. 또 퇴출 직후인 5월22일 정식으로 키친아트 상표권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채권을 노조에 양도양수 한다'는 합의를 한다.

경동산업의 모든 채권을 양도받은 노조는 이때부터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100억원에 달하는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경동산업을 20∼30년씩 다니면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낸 노동자들', 이들에게 퇴직금은 단지 돈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짐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은 이름만 남은 경동산업에 사표를 제출하고 (주)키친아트의 주주가 됐다. 다른 한편 노조는 도매업자들을 불러 도움을 청했다. "책임지고 경동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주)키친아트는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 3월16일 (주)키친아트로 법인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한 두 번의 난관을 겪은 게 아니지만 부채가 한 푼도 없는 알짜배기 우량기업을 만든 것이다. 주주(조합원) 전원에게 1인당 약 200만원씩의 배당금을 네 차례나 지급하기도 했다.

12년 전인 89년 9월4일. 경동산업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한을 남긴 날이다. 그 날의 한이 오늘 키친아트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어용노조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던 친목회 '디딤돌' 회원 10여 명이 대량징계에 항의해 최경환 사장실을 점거했다. 이들 모두 온몸에 시너를 붓고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죽으려면 죽어!"

그리고 잠시 후……

그 사건으로 강현종, 김종하씨는 고인이 되었고, 실신해 쓰러진 디딤돌 막내 최성춘씨와 박선태씨는 병원에서 '자살방조, 업무방해, 방화, 화염병투척, 폭력' 등 10여 가지 '죄명'으로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다. '4년 3개월 1일'동안 구속돼 있었던 박선태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감옥에 있으면서 이를 갈았다. '반드시 복수를 할거다.' 근데 복수가 이 방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실험"

"우리는 투명경영과 참여경영으로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실현하는 기업을 만들 것이다."
이들은 이날 창립기념식에 앞서 임시주주총회를 갖고 몇 가지 의미있는 회사의 운영원칙과 사업방향을 결정했다. "2002년도까지는 자체 공장설비를 완비하여 현재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을 벗고, 흩어진 경동가족들을 다시 모아 직접 생산한다. 부채없는 경영을 실현한다. 또한 개인의 회사가 아닌 모두의 경영으로 직원과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 구체적으로는 총 순이익의 40%는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30%는 공장설비를 위해 적립하고 30%는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경동산업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개인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업, 누가 경영하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그간 경동노동자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89년 9.4 사태 때 고인이 된 김종하, 강현종씨의 추모사업회를 설립,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나 그들의 자녀 학비를 대는 장학사업을 하는 것도 (주)키친아트의 경영 목표라고 이들은 말한다.

한 때 경동산업 노동자들에게 고급 주방용품 키친아트를 만드는 일은 '전쟁같은 고역'이었고, 동료들의 잘린 손가락이 투영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 키친아트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뿌듯함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키친아트가 넘어야할 산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 앞에서 오만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암울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나침반으로 삼은 경동산업 노동자들 아니, (주)키친아트 경영진들의 이 새로운 실험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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