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를 방문하면서 새해를 시작했다. 신정 연휴가 끝난 1월3일 방문했으니 첫 방문지나 다름없었다. 위기에 처한 조선소와 노동자에게 힘을 주고자 했다. 조선업 강국이라는 옛 영광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에 화답했다. 문 대통령은 “해양강국은 포기할 수 없는 국가 비전”이라며 “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조선업 혁신성장 방안을 1분기 중에 마련해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위기로 신음하던 경남지역 조선소 노동자들은 문 대통령 발언에서 희망을 봤다고 입을 모았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8일, 유동성 위기를 겪는 중형조선소의 운명이 결정됐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구조조정 등에 따른 지역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성동조선해양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는 반면 STX조선해양은 노사가 만든 자구안을 고려해 구조조정 방향을 정하기로 했다. STX조선은 회생할 수 있는 여지를 줬지만 성동조선은 법원 결정에 맡겨 버렸다.

STX조선 처지도 녹록지 않다. 김 부총리는 “STX 노사가 4월에 자력생존이 가능한 고강도 자구노력과 사업재편안을 확약하지 않으면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밝혔다. 현재 인원의 40% 이상 감원과 임금삭감을 결정해야 할 STX조선 노사 입장에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김 부총리 발언을 보면 문 대통령이 약속한 조선업 혁신성장 방안은 온데간데없다. 구조조정 대책이 그 자리를 차지한 느낌이다. 지난해 11월 산업정책을 고려한 구조조정 원칙을 발표할 정도로 호기롭던 정부가 참신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당시 채권단을 중심으로 한 외부용역 실사 결과를 뒤로한 채 정부는 절차를 새로 밟았다. 정부에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도 만들었다. 금융논리 중심의 구조조정 대책을 지양하고 산업정책을 고려한 구조조정 원칙도 천명했다. 과거 정권 시절 주무부처였던 금융위원회는 산업통상자원부에 바통을 넘겼다. 물론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 좌장은 김동연 부총리다. 그래도 백운규 산자부 장관이 전면에 나섰다. 백 장관은 “중형조선소는 전체 조선산업 정책 속에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다시 산업정책 없는 구조조정 대책을 내놨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이런 결과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조선업 혁신성장 방안과 구조조정 대책을 함께 제시할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마저 꺾어 버렸다. 조선소를 살리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이 희망고문을 한 셈이다. 두 조선소 노조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금속노조 성명에 격앙된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성동조선과 STX조선은 채권단 요구로 1천명이 넘는 조합원 중 각각 30%씩 줄였다. 임금 10% 삭감, 사내복지 축소, 조합원 휴업도 감당했다. 성동조선의 경우 실사를 한다면서 영업활동을 중단시키더니만 저가수주라며 선주사와 협상마저 못하게 했다. 그러더니 인원을 더 줄이라 하고, 나머지는 청산하겠다고 한다. 좋은 일자리 만드는 것을 우선하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어디로 간 것인가. 정부는 중형조선소 살리기를 포기하고 최악의 정책을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정부 대책이 불가피했다고 분석한다. 그간 수출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10조원을 성동조선(4조원)과 STX조선(6조원)에 지원했지만 회생전망이 불확실하다는 진단이 나와서다. 이 진단에 기대어 성동조선(5척)과 STX조선(16척)의 수주잔량을 추가지원 여부 변별요소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종전의 금융 중심 구조조정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정부에 묻고 싶다.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까지 만들었지만 산업정책은 여전히 ‘공란’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에 냉정한 금융시장 논리만 적용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비슷한 처지인 한국지엠·금호타이어에도 정부의 산업정책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정부는 새로운 구조조정 원칙을 천명하고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만들었던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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