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업계 ‘태움 문화’ 고발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서울 대형병원 신규 간호사 ㅂ씨가 지난 설 연휴 기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유족과 남자친구가 ㅂ씨가 ‘태움’으로 괴로워했다고 밝히면서다. 병원측은 “같이 근무했던 간호사들을 1차 조사한 결과 괴롭힘이나 인격모독은 없었다”고 일축했다. 경찰은 ㅂ씨 사망 동기를 밝히기 위해 수사에 나섰다.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를 괴롭히며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환자 안전을 다루는 만큼 수직적 질서가 엄격한 병원 특성이 부정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오래전부터 간호업계에서 관행처럼 존재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실제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23일 발표한 ‘의료기관 내 갑질문화와 인권유린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간호사 6천94명 중 41.4%인 2천524명이 "태움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ㅂ씨 사건의 원인을 ‘태움’으로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병원 곳곳에 만연한 태움 문화를 근절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태움 문화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근절해야 할까.

절대적인 선배, 신규 간호사 “찍힐까 봐 침묵만”

“응급상황에서 후배가 실수하면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지르게 돼요.”

서울의 한 병원 8년차 간호사 A씨에 따르면 병원은 '올드(선배)는 올드대로 신규는 신규대로' 힘든 곳이다. A씨는 “평소에 후배들에게 잘해 주려고 하는데, 응급상황이 벌어지면 따로 불러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대개 신규 간호사가 병원에 입사하면 정원 외 추가인력으로 분류된다. 선배에게 일을 배운 뒤 정규인력으로 투입된다. 정규인력으로 투입된 뒤에도 일정 기간은 프리셉터(후배를 일대일로 가르치는 사수) 또는 선배들이 함께 일을 봐준다. 문제는 프리셉터가 자신의 일을 줄이지 못한 채 신규 간호사 교육을 떠맡는 것에서 발생한다.

A씨는 “간호사는 연차가 올라간다고 업무가 줄어드는 구조가 아니어서 프리셉터도 자신의 일만으로도 하루 2~3시간을 추가로 근무하며 허덕인다”며 “그런 상황에서 후배까지 가르쳐야 하니 후배 존재를 반길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프리셉터는 자기 환자 15명에, 후배가 맡아야 하는 15명까지 30명의 환자 차트를 보게 되는 것”이라며 “업무가 가중되면 예민해져 후배가 조금만 실수하면 짜증을 내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규 간호사의 불안한 처지가 선배 간호사 권력을 공고히 하는 측면도 있다. 신규 간호사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현장에 접목시켜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복수의 간호사들은 “요즘에는 학생들이 병원에 실습을 와도 환자에 주사 한 대 못 놓고 구경만 한다”거나 “4년 내내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실제 현장에서 쓰이는 술기는 엄청나게 다르다”고 밝혔다. 신규 간호사에게 프리셉터의 도움은 생존을 위한 필수다. 선배의 과도한 괴롭힘에도 신규 간호사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A씨는 “선배에게 잘못 보이면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거나 작은 일을 트집 잡아 힘들게 하는 일이 많다”며 “연차가 어릴 때 나도 선배가 동기 손등을 자로 툭툭 치면서 학생 훈계하듯 혼내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는데 선배에게 ‘찍힐까 봐’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배가 차트를 던지거나, 퇴근한 후배를 밤늦게 병원으로 불러내는 것도 봤다”고 전했다.

충분한 교육기간 없이 신규 간호사를 정규인력으로 투입하는 시스템도 태움 문화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꼽힌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병원에 따라 신규 직원이 추가인력으로 일하는 기간이 2주·4주·6주, 길게는 3개월로 다른데 대부분 숙지할 내용에 비해 기간이 짧다”며 “무조건 못한다고 괴롭힐 것이 아니라 환자 안전과 직결된 일인 만큼 배울 수 있는 기간을 최소 3개월, 대형병원은 그 이상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력확보 정부 지원, 자정운동 필요”

병원 내부 시스템 개선과 함께 간호사 내부에서도 자정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나영명 노조 정책국장은 “태움 문화를 근절하려면 선배가 업무에서 해방돼 후배를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며 “후배 교육만 전담하는 프리셉터를 따로 두고, 인력을 충원해 과도한 업무량을 줄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국민 생명이 달린 문제인 만큼 정부 지원이 시급하다”며 “교육훈련·인력확보를 위한 투자는 의료사고 위험성을 낮춰 비용 손실을 줄인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나 국장은 내부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간호사들의 자발적인 노력도 주문했다. 그는 “간호사 내부에서도 조직문화를 바꾸려는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며 “병원 간호부장이나 주요 직책을 가지고 있는 간부들이 노력해야 후배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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