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자운 변호사(반올림 상임활동가)

대상판결 : 대법원 2017.11.14. 선고2016두1066 판결

사건의 경과

고 이윤정씨는 1997년 5월 삼성전자 온양공장에 입사해 6년간 ‘고온테스트(MBT, 반도체 칩에 고온의 열을 가해 불량품을 선별하는 공정)’ 공정 오퍼레이터로 일했고, 퇴사한 지 약 7년 후에 뇌종양(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고인은 온양공장에서 한 업무로 인해 뇌종양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2010년 5월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질병에 따른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처분에 앞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는데, 산보연은 “사업장 내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낮아, 업무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산보연은 이 조사에서 다른 연구에서 확인된 일부 발암물질의 노출가능성과 재해자쪽이 지목한 물질(고온테스트 설비에서 나오는 배출가스와 검댕·분진 등)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역학조사 평가위원 중 한 명이 검댕·분진 등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조사는 그대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근로복지공단은 이러한 산보연 역학조사 결과에 근거해 2010년 9월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이윤정씨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소 제기 한 달 뒤인 2011년 5월 뇌종양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뇌종양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 제보 중 백혈병 다음으로 제보자가 많은 질병이다. 현재까지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렸다고 제보한 사람의 숫자는 총 29명. 그중 11명이 산재보상 신청을 했는데 근로복지공단은 9명에게 불승인 처분을 했고, 최근 1명(삼성반도체 IMP공정 엔지니어)에게만 승인 처분을 했다. 불승인 처분을 받은 제보자들 중 이윤정씨를 포함해 3명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1명(삼성LCD 모듈공정 오퍼레이터)은 패소 확정됐고, 나머지 1명은 현재 1심 소송이 진행 중이다.

1·2심 판결의 요지

서울행정법원(판사 이상덕)은 2014년 11월7일 “벤젠·포름알데히드·옥사이드에틸렌·다핵방향족탄화수소·납 등의 유해화학물질과 극저주파 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등 유해요소들에 지속적·복합적으로 노출된 후 뇌종양이 발생했으므로 질병의 발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서울행정법원 2014.11.7. 선고 2011구단8751 판결).

이 판결은 이례적으로 삼성전자의 화학물질 관리 문제와 산보연의 역학조사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재판장 김주현)은 2016년 10월6일 위 1심 판결이 나열한 유해인자들 중 일부(벤젠·포름알데히드·납)에 대해서는 “노출 정도가 낮았다”고 봤고, 다른 일부(에틸렌옥사이드·다핵방향족탄화수소)에 대해서는 “노출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으며, 나머지(극저주파자기장)에 대해서는 “뇌종양과의 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결론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이 판결도 산보연 역학조사의 문제점(재해자쪽이 주장한 고온테스트 설비 배출가스·검댕 등을 조사하지 않은 문제)을 지적하고는 있으나, “그러한 경우에도 어떠한 유해물질이 존재하고 그 유해물질과 특정 질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상당한 개연성은 인정돼야 하며, 이러한 개연성이 담보되지 않은 사정들이나 가능성만으로 막연하게 인과관계를 추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업자에게 인과관계 부존재의 증명책임을 지우는 것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서울고등법원 2016.10.6. 선고 2014누8492 판결).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특정 유해인자들(벤젠·포름알데히드·납·에틸렌옥사이드·다핵방향족탄화수소 등)의 실제 노출 여부와 그 정도였다. 망인이 근무하던 시기에 삼성전자는 위 유해인자들의 노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고(당시 삼성전자는 해당 공정에서 ‘소음’만 측정했다고 진술했다), 산보연 역학조사에서도 위 유해인자들의 노출실태는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이처럼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규명되지 않은” 유해인자 노출 여부와 그 정도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1·2심 판결의 결론이 달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판결의 요지

대법원(주심 박보영)은 먼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란 의학적·자연과학적 판단과 구별되는 “법적·규범적 관점”에서의 판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고는 “질병이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이른바 ’희귀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며 “질환의 평균 발병률보다 특정 산업 종사자에서의 발병률이 높거나,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을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인자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를 전제로 이 사건 망인의 가족 중 유전 질환이나 암으로 투병한 환자가 없었던 점, 같은 사업장에 관한 다른 직업병 사건에서 벤젠과 포름알데히드·비전리방사선·납 등이 검출된 점 등을 종합해 “망인의 업무와 뇌종양 발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긍정할 여지가 크다”고 했다.

대법원은 그러한 판단의 구체적인 근거들도 제시했다. 특히 사업장에서 발암물질이 노출기준 미만으로 측정된 점에 관해서는, 저농도 노출이라도 장기간 노출되면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수 있고 여러 유해인자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서, 망인이 여러 발암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채 밤낮 주기가 불규칙하게 변하는 교대근무까지 수행한 것을 지적했다.

또한 이 사건 역학조사에서 일부 발암물질의 노출수준이 측정되지 않았고 원고쪽이 주장한 유해물질이 조사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할 때에는 역학조사 자체의 한계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망인이 퇴직 후 7년이 지나고 나서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은 것에 관해서는 “신경교종이 발생했다가 수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교모세포종으로 변화하는 사례가 있고, (교모세포종은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알려져 있지만)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종양이 빠른 속도로 성장·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 발암물질에 노출된 후 뇌종양 발병에까지 이르는 속도 역시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그러한 사정만으로 망인의 업무와 뇌종양 발병 사이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했다.

판결의 의미

첨단전자산업에서 발생하는 희귀질환의 업무관련성을 판단함에 있어 이 사건 판결이 전제한 법리들은 올해 8월에 나온 삼성LCD 희귀질환에 대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7.8.29. 선고 2015두3867 판결) 취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해당 판결은 “산재보험제도가 첨단전자산업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현실적·규범적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번 판결은 그 판결의 취지를 그대로 수용한 첫 번째 대법원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은 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을 직업병으로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다. 앞서 밝혔듯 반도체·LCD 공장에서 많은 뇌종양 피해가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다른 사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법리적으로는 이른바 ‘유해물질 복합노출의 상가작용’을 적극 고려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업장에 단일한 유해인자가 홀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반도체 공장과 같이 여러 유해물질이 함께 쓰일 뿐 아니라 방사선, 교대근무, 과로·스트레스 등 유해인자까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경우 각 유해인자의 유해성이 상호간에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최근까지 근로복지공단은 이러한 ‘상가작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단일 유해물질의 노출이 낮은 수준으로 측정된 점을 강조하며 불승인 처분을 해 왔다. 8월 대법원 판결과 이번 판결이 그러한 공단의 잘못된 처분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끝으로 이번 판결은 산보연 역학조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는데 이 또한 8월 대법원 판결은 물론, 그 앞에 선고된 여러 반도체 직업병 관련 판결에서 여러 차례 지적됐던 문제다. 공단의 업무상질병 판정 절차를 전면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반도체 직업병과 관련해 올해 선고된 8개의 판결은 모두 재해자쪽 손을 들어줬다. 내용들을 보면 하나같이 정부의 산재보험제도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정점에 8월 대법원 판결과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이 있다.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심경우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최근 삼성직업병 관련 대법원 판례 등 새로운 판결 경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제도개선 등을 통해 노동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추상적인 다짐과 약속에 그칠 일이 아니다. 최근 판결 취지가 향후 모든 직업병 사건에 세세하게 반영되도록, 고용노동부가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이 10년 넘게 싸워 얻어 낸 판결들이다. 그 의미에 걸맞은 정부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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