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관희 노무사(민주노총 법률원)
어떤 노동자가 죽었다. 그는 십수 년을 12시간 맞교대로 공장에서 일하다 죽었고, 그는 수년간 가족과 떨어진 채 일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 이미 흩어져 버린 과거를 모으려는 행위는 미처 모른 채 지나갔다는 자책감으로 가족의 가슴을 두드려 팼다. 그렇게 나는 그 노동의 결과를 샅샅이 분해하면서 시나브로 그들의 삶에 들어가 때로는 심장 한구석을 콕콕 쑤시는, 더럽게도 싫은 아픔을 공감해야 했다.

어느 누군가는 “청소노동자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새벽 서너 시에 집을 나서고 오후 3시면 일을 끝마친다. 술이라도 한잔 하면 이른 오후에 마시게 되니 다음날 새벽에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또 일을 나서야 한다. 이들에게 가정의 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것인가. 청소노동자도 정상적인 아침 출근을 하고 오후에 퇴근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게 인간다운 노동이 실현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다. 미래의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밥을 먹고 때로는 즐기고자 해야 할 이 ‘일’이란 것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 키워야 하는 어떤 이의 운명이고, 그것을 한 꺼풀 더 벗겨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이젠 늙고 힘없어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지라도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는 먹고살 돈 그 자체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성장한계에 다다른 이 자본주의 국가는 ‘그 어떤 이의 노동’을 무엇으로 탈바꿈시키는가. 노동과 자본을 대별시키고 자본축적을 통해 성장한 경제적 부를 사회 구성원이 고루 나누어 유지하는 이상사회를 꿈꾸는 무수히 많은 자들, 촛불로 무너진 ‘소(小)군국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경제학자 혹은 그런 류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이의 노동’이란 그의 삶에 유일한 기반이 아니라 그저 한낱 노동의 결과만으로 축적된 눈곱의 때만도 못한 조그마한 자본에 불과한 것일 게다.

노동사건을 담당하는 어떤 지역의 노동위원회는 인력의 한계를 이유로 해서인지 출석 조사 한 번 진행하지 않고 당사자 주장을 조사보고서에 담아 심문회의를 여는 게 다반사고 ‘수사’가 아니라 ‘조사’라는 핑계를 대며 법에 명시된 조사권이 무색할 정도로 손 하나 대지 않던 공공기관의 자료는 가까스로 기댄 의회권력을 통해서 밝혀지는 우스운 광경에서 직권심리주의를 병행하는 노동위원회 제도가 무엇하러 있을 것이며, 한 이주노동자의 근무태만을 이유로 이탈신고를 수리하면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중하다는 것으로 사업주 변명을 퉁치고 규정에도 없는 사항을 이탈신고 사항이라 심사하고 있는 고용지원센터의 헛소리는 1인 기업이라는 정부의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아 마땅찮다.

법치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 거기에 이성적 판단을 내려 유지되는 사회, 자유·정의·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자 국가권력이 국민을 위해 가동되는 민주사회라며 떠들어 대는 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행정기관은 그 사건이 담고 있는 노동의 실체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는가. 아니 다가서려 하기는 했던 것인가. 최근 모 정당의 의회활동으로 노동부가 부당노동행위와 불법파견 처분을 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지만 국가권력의 독점과 남용을 막고자 하는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감시라는 시스템만으로는 평생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할 사람들은 행복의 옷자락도 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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