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100년이다. 1917년 11월7일 노동자들은 동궁을 향해, 자신의 권력을 향해 돌격했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카렌스키 임시정부를 붕괴시켜 노동자권력을 세우기 위해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던 날이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평화와 빵”을 외치며 몇 시간 만에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접수했다. 이후 세계사는 혁명 전후로 시대구분해서 전개됐다. 세상 어느 곳도 러시아혁명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었다. 선진자본주의 제국주의 나라들도, 식민지 민족들이나 제3세계 나라들도 이 혁명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은 이 혁명이 제기한 것을 외면하고서는 전개될 수가 없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해방투쟁과 해방 후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도 그랬다. 제국주의 일본에 결탁한 매국노와 사용자 자본에 협력한 어용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혁명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든, 현실적 타산을 강조하면 변형하고자 한 것이든 운동은 거기서 묻고 답을 찾아야 했다.

2. 혁명은 ‘노동·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으로 자신의 세상을 선언했다. 권리선언 1조에서 “러시아는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들의 공화국임을 선포한다. 중앙과 지방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들에 속한다”고 선언했다(1항). 2조에서는 “제헌의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착취를 억제하고, 계급 차이의 완전한 철폐를 공화국의 목적으로” 하고, 공화국은 “공장·상점·광산·철도 및 기타 생산과 교통수단의 공화국으로의 완전 이양할 첫 단계로서, 착취자에 대한 노동대중의 우월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헌의회는 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및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가 제정한 노동자의 생산 통제에 관한 법률 및 인민경제 최고소비에트에 관한 법률을 인준”하고(2항), “제헌의회는 자본주의 굴레에서 노동대중을 해방시킬 조건으로서 모든 은행의 소유권을 노동자·농민 정부로 이양할 것을 인준”하며(3항), “사회의 기생적 계급들을 제거하고 국가의 경제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의 보편적 의무가 도입”된다고(4항) 결의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의 인권선언이 국가로부터의 기본권 목록을 선언하는 것이라면, 러시아혁명에서는 공장 등 생산수단의 국유화, 노동의 보편적 의무 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를 중심으로 보자면 프랑스혁명은 국가(왕)로부터 재산권을 시민의 기본권으로 보호함을 선언한데 대해 러시아혁명은 사회적 소유를 위한 조치로 국유화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공장·농장 등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착취하는 기초라고 보고 노동하는 인민의 공동 소유로 전환해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이 러시아혁명의 인권선언이었다. 생산수단의 소유로 보자면 프랑스혁명에서 시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했던 것을 러시아혁명에서는 박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주요 생산수단 등의 공화국 이양, 즉 국유화가 급박한 혁명 시기에 과도적 수단인지 아니면 그것이 해방세상의 물적 기초라는 것인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후 혁명의 건설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노동의 통제와 강제로 나타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나라를 포함해서 많은 나라에서 자본주의 폐해의 극복 수단으로, 심지어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국유화가 행해졌다. 하지만 국유기업 등 국가 부문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착취자로부터 해방돼 주인으로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사용자에 복종해서 일하는 노동자였고, 그는 사용자 자본에 복종해서 일할 때와 다름없이 일해야 했다. 노동의 생산물은 여전히 자신이 처분에 맡겨져 있지 않았다. 노동과정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어떤 경우든 생산성과 합리성을 내세워 효율적인 관료적 통제체제에서 일해야 했다. 분명히 100년 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주인인 세상을 꿈꿔 봉기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차지했다. 노동하는 인민의 권리선언을 새로운 세상의 인권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사라졌다.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은 러시아에서 오늘 사라졌다. 노동자평의회 소비에트도 이 세상 노동자의 머리에 없다. 사용자 자본이 임명하던 생산반장 등 작업장 관리자를 노동자들이 선출하던 세상은 100년 전의 혁명으로 잠시 이 세상 노동자들에게 왔다가 바로 사라졌다. 혁명으로 쟁취한 노동자의 권력은 노동자를 주인에서 밀어내고 노동자를 통제하는 관리자들을 임명했다. 혁명 이후 세계사는 노동자에게 “평화와 빵”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혁명과 전쟁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이 헛되이 바쳐졌다. “평화와 빵”으로 노동자를 부르는 혁명은 빛이 바랬다.

3.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소비에트 정부는 ‘8시간 노동제’를 선포했다.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서 결의하고,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전개했던 바로 그 ‘8시간 노동제’를 선언했던 것이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전개한 혁명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서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창설돼 제1호 협약으로 공업부문에서 8시간 노동제가 채택됐다. 러시아혁명의 파도가 덮칠까 두려워하는 각국 정부와 사용자 자본이 노동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근로기준법 50조에 “1일의 근로시간은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법정근로시간을 규정하게 된 것도 이렇게 보면, 러시아혁명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이 나라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이 1호 협약을 비준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은 8시간 노동제를 끊임없이 외쳤고, 해방 후에도 이는 노동운동의 주된 구호였으며,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면서 규정됐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1일 8시간의 법정근로시간에 관한 법 규정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노동제로서 집행되지 않았다. 이에 더해 1주일에 12시간을 추가로 연장해서 근로할 수 있다고 규정해서 근로기준법은 8시간 노동제를 집행되지 않는 법 규정으로 전락시켰다(53조). 고용노동부는 주휴일 등 휴일의 근로는 법정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고 별개라고 행정해석해 집행했다. 사실상 우리 노동자에게 노동제는 존재한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 이 나라에서 국가권력과 사용자 자본은 노동자·노동운동을 전혀 두려하지 않았던 게다. 그렇더라도 우리 노동자는 여전히 러시아혁명의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를 빚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100년이 지난 오늘, 러시아혁명은 우리 노동자의 권리로 유산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4. 분명히 혁명은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의 호소로 봉기가 조직됐어도 혁명은 러시아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은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심감으로(존 리드 <세상을 뒤흔든 10일>), 러시아 노동자들은 낡은 착취의 세상을 쓸어 버리고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고 거대하게 분노해서 일어섰던 것이다. 이미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관리자들을 수레에 실어 공장 밖으로 쫓아 버렸다. 작업장은 노동자들의 차지였다.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위원회를 구성해서 생산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에게는 작업장과 국가권력이 다르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자신들이 하던 대로 국가도 그렇게 관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떠한 특권도 부여되지 않았고 대표는 노동자 대중의 의사에 따라 즉각적으로 소환됐다. 노동자평의회 소비에트는 노동자 자신이 그것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스스로 조직한 위원회였다. 혁명은 그렇게 왔다. 100년 전 러시아에서 혁명은 노동자 대중의 운동으로 왔다. 노동자 대중의 의사는 즉각 혁명의 의지로 반응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혁명일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는 아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 더는 러시아혁명을 두고서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라고 위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혁명 이후의 시간은 노동자들이 “위대한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인가. 혁명 이후 세계사는 수백·수천만의 노동자들이 노동의 이름으로 혁명과 전쟁에서 피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건만 더는 위대한 노동운동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권력의 폭력, 통제와 복종만을 기억할 뿐이다. 노동자 대중의 의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국가와 작업장은 없었다. 노동자의 이름을 참칭하는 권력과 노동통제의 작업장이 있었다. 러시아혁명 당시 넘쳐났던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이후 국가와 작업장에서 도대체 어떻게 작동했더란 말인가. 노동자의 민주주의로 읽자면 혁명 이후 세계사는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현실사회주의에서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노동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노동자정당 등 전국단위로 조직되는 노동자조직은 그랬다. 8시간 노동제와는 달리 이에 관해서는 어떠한 유산이 남겨져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당시 노동자 대중의 분출하던 의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그 민주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로 읽자면, 러시아혁명 이후 100년은 노동운동이 노동자 대중을 민주주의로 조직해 내는데 실패한 현대사였다.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100년이다. 어떻게 노동자들이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인가. 노동자 대중의 의지로 달려 나가는 노동운동의 민주주의에 달려 있다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노동자들이 꾸게 될 꿈까지도.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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