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석군 변호사(법무법인 민국)

지난 20일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의 불법파견 노동자들이 934일 만에 사측과의 합의로 정규직으로 전환돼 복귀하게 됐다. 동양시멘트 근로자들이 이끌어 낸 합의는 진정한 정규직으로 하청업체 근속연수를 그대로 인정받고 그와 동일한 직급과 호봉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회사는 조합원들에 대한 가압류 가처분을 비롯해 노동조합 쟁의행위에 의해 50억원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 취하에도 합의해 노조활동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으로 압박하던 기업들의 행태에 변화를 이끌어 낼 새로운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동안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부처의 비전을 허울뿐인 문구로 방치하던 고용노동부 또한 늦었지만 자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부는 지난 21일 파리바게뜨 본사의 가맹점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제빵기사와 카페기사 5천378명을 직접고용하도록 하는 시정명령을 내린 것을 필두로, 자동차부품 업체 만도헬라의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협력업체 근로자 260여명을 직접고용하라는 시정지시를 내릴 예정이다. 2년간 끌어오던 구미 아사히글라스의 파견법 위반사건은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하고 178명의 근로자들을 직접고용하도록 시정지시를 내렸다.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존권은 후퇴하고 노조할 권리는 억압돼 온 왜곡된 노동환경을 바로잡는 데 있어 전 사회적인 시각 변화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어렵게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막막한 상황을 오랜 투쟁으로 버텨 낸 노동자들의 힘이 그 근본적인 버팀목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권교체와 더불어 일사불란하게 바뀌어 버린 기업과 정부기관의 태도는 우리 사회 정치권력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런 변화 분위기에서 사법부만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법원은 올해 8월 말 사회 이목이 집중됐던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리고 그동안 사측의 주요한 반박논리로 원용돼 왔던 신의칙 적용 주장을 기각했다. 노동환경에 대한 달라진 사회 분위기에 어느 정도 어긋나지 않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판결에서 법원은 휴일근로에 대한 연장근로 가산수당 청구를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인정금액을 줄이는 모습을 보였고, 근로기준법에 의해 인정되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신의성실 원칙이라는 불확정적이고 보충적인 규범으로 제한한 기존 판례 자체가 정당성이 심히 의심됐던 판결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법부의 노동사건에 대한 입장에 변화가 있다고 확신하기는 아직 어렵다.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사법부가 과거 정치권력의 직접적 영향력 속에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법관의 독립성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사안에 대한 재조사를 거부하며 24일 자정을 기해 임기를 마치게 된 양승태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사법부의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며 법관의 독립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주로 분쟁의 사후적 해결기관으로 제도를 발전적으로 선취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고 입법기관이 아닌 사법부 수장이라면 그러한 점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 교체와 관계없이 사법부 독립은 일관성 있게 유지되고 실현돼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작금의 사법부 불신은 대법장이 퇴임사에서 우려한 것처럼 ‘이분법적 사고’와 ‘진영논리 병폐’ 때문이라 보기 어렵다. 이보다는 사법부가 정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여타 국가기관과 다른 ‘사법부만 행할 수 있는 가치’를 지키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회정의와 인권은 법·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으며 법을 적용하는 사법부가 정의와 인권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과거 일부 법실증주의자 외에는 찾기 어렵다.

인권에 대한 개념은 이미 1950년대 이전부터 고전적인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고 연대하는 방향까지 발전돼 있었다. 우리 헌법 또한 우리 사회 발전상황에 비춰 많이 앞선 여러 기본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법부는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 개념 속에 갇혀 이러한 가치를 판결에 담는 것을 회피해 왔다. 정치세력의 영향을 피해 살아남는 것이 사법부의 가치가 돼서는 곤란하다. 판결에서 가치를 빼는 것이 사법부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정치권력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법부의 위상을 세우는 길이 될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임기가 100일에서 한 달이 지난 현재, 아직까지는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에 더욱 기대를 하는 상황이다. 새로운 대법원장의 국회 동의가 가결돼 25일 취임을 앞두고 있다. 더 이상 사법부 독립이 우리 사회 현실과 유리된 자기만족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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