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정부도 노동계도 "노동존중 사회"를 외친다. 수십년간 적폐가 쌓인 한국 사회.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면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툭하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만큼 국제기준과 거리가 먼 분야도 드물다. 실제 한국 노동지표는 국제노동기준을 한참 밑돈다. 노동존중 사회로 가려면 국제노동기준부터 지켜야 한다.
서울시가 9월5일부터 6일까지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을 서울에서 개최한다. <매일노동뉴스>가 주관한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려는 서울시의 노력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도시들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다. 국제포럼에는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기구 관계자들과 세계 여러 도시 대표자들이 참석한다. <매일노동뉴스>가 '국제노동기준부터 지키자' 기획보도 일환으로 서울시 국제포럼 세션 좌장을 맡은 전문가들을 인터뷰한다.

1. 노동기본권 국제노동기준
2. 좋은 일자리 국제노동기준
3. 노동존중 사회는 노동존중 도시로부터
4. 노동전문가 릴레이 인터뷰

좋은 나라·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무엇일까. 서울시가 주최하는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 첫날인 5일 고용 세션에 참가하는 세계 각국 전문가들이 해답을 찾아 머리를 맞댄다. 세션 좌장을 맡은 이병훈(59·사진)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나라·사회·도시의 경제생산과 사회복지를 위해 충족해야 할 요소가 고용"이라며 "예산·행정 틀은 중앙정부가 제공하지만 집행하고 실현하는 곳은 현장과 지역"이라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지역 차원의 일자리정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병훈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정책을 국정과제 전면에 내세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정책 성공을 위해 서울시 족적에서 해답을 찾고, 노동시장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그는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노동존중 가치를 국내에 확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흑석동 중앙대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 좋은 사회와 좋은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고용은 어떤 의미인가.

"일자리 만들기는 나라·사회·도시의 경제생산과 사회복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요소다. 많은 나라가 일자리 없는 성장과 일자리 질 악화로 인해 사회경제적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분배 영역에서 심각한 양극화가 발생했다. 좋은 일자리 만들기가 여러 나라의 정책 화두가 된 까닭이다. 일자리는 중앙정부 노력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 법과 예산, 행정 틀을 중앙정부가 제공하지만 실제 집행하고 실현하는 곳은 현장이고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시가 중심이 돼 일자리 문제를 적극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꾸준히 시도해 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서울시가 국제노동기구(ILO)와 함께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ILO 핵심협약조차 비준하지 않았다.

"이번 국제포럼을 기점으로 노동에 대한 국제적 규범이 국내에 확산됐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환영할 일이다. 협약 비준으로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사용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노동권 신장을 위한 논의를 공론화하고 의견을 모아 나가야 한다. 논의의 핵심은 국회가 될 것이다. 정부가 행정적으로 비준할 수 있다고 해도 의미 있는 결과로 나아가려면 노사 주체의 공감뿐 아니라 국회 차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적·국가적으로 힘을 받는다.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노동존중 가치를 국내에 확산할 다양한 계획이 필요하다."

- 서울시 노동·일자리정책에서 주목할 점은 무엇인가.

"박원순표 노동정책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다. 초기에는 서울시가 왜 저런 정책을 앞장서 펼치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중앙정부와 다른 지자체는 생각지도 않았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서울시가 추진했다. 생활임금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시도를 했다. 박원순 시장이 정책기조와 방향을 제시하고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며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서울시 행정조직을 개편했고, 외부 전문가그룹 역량도 결집했다. 박 시장의 족적이 문재인 정부의 큰 밑천이 됐다. 서울시 사례는 두고두고 평가받을 것이다."

- 어떻게 하면 서울시 사례를 다른 지자체 혹은 중앙정부로 확산할 수 있을까.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리더의 정책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 시장은 인권 감수성을 노동 감수성으로 발현했다. 참모라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정규직화 정책·생활임금·노동존중 기본계획을 현실화하는 데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서울시에 노동정책국을 신설하면서 집행동력을 만들었다. 리더 생각과 전문가 결합, 집행부서 열정 세 가지 요소가 잘 배합됐다. 다른 지자체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도 참고할 만하다."

-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일자리 문제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 정부가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방향에서도 일자리 양 중심이 아니라 질 측면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나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대목이다. 시장주의자들은 정부가 지나치게 일자리 문제를 주도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해결하려던 지난 9년의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실패 경험을 성찰하고 특단의 돌파구를 열어 가야 한다."

- 문재인 정부가 노동정책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나.

"조급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책은 준비됐을 때 공표하고,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집행해야 한다. 최근 선언이 먼저 나오면서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높은 기대를 가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의 갈등은 정부의 조급함이 만들어 낸 측면이 크다. 정책이 완성되려면 법·제도가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과정과 시간이 걸리는데 정부가 앞서서 내지른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지뢰를 곳곳에 스스로 깔아 놓고 있다. 지뢰를 일일이 제거하며 한 발씩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

- 정부 정책이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시장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정부가 노사 손목을 비틀어 끌고 나가서는 바뀌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변화를 꾀할 정도의 준비를 하지 못한 모습이 벌써 보인다. 공공부문 정규직 대책 하나만으로도 현장에서 온갖 갈등을 촉발하고 있다. 정부 정책이 성공하고, 지속가능하려면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합의에 기초해 한 발씩 나아가야 한다. 지금 정부는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대통령이 앞서고 각 부처가 뒤따르는 모습이다. 노동시장 판을 흔들어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지만 판을 크게 흔들어 보려고 한다면 잘 짜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거기까지 준비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 민주노총을 빼고서는 사회적 대화를 완성할 수 없지 않나.

"조합원 실리를 앞세웠던 노동운동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명분을 얻고 실리를 양보할 때 노동운동도 살고, 사회적 영향력과 협상력도 커진다. 조직도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를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을 만들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운다. 유럽의 경우라면 정부와 노조가 손을 잡아야 성공가능한 모델이다. 그런데 청와대 경제라인에서는 노조를 빼고 정부가 전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기류를 보이고 있다. 조합원 실리주의를 앞세운 노조라면 함께 가기 어렵다고 본다. 정부와 노동계가 따로따로 맞서면 소득주도 성장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10% 조합원은 조금 덜 챙기더라도 미조직 90% 노동자를 총연맹·산별노조로 끌어들일 수 있는 미래전망을 세워야 한다. 중앙 노동운동을 이끌어 가는 주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