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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풍경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지난달 18일 오후 1시께 16차 범국민행동의 날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전과 달리 시청역에서 내려 서울광장으로 들어섰다. ‘태극기집회’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든 ‘어르신’들이 서울광장과 대한문 앞 도로를 그득 메우고 남대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탄기국(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이 주최하는 13차 탄핵기각 총궐기 결의대회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됐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들은 탄핵무효를 외치며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박영수 특검을 비난했다. 성조기를 흔들며 이 나라를 해방시켜 주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준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있는 이유였다.

국정농단 사태는 최순실의 불륜남 고영태와 그 일당들이 기획한 것이고 대통령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검찰과 특검 수사는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며칠 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19세 청소년 한 명이 연단에 올라 아무런 증거도 없이 대통령 탄핵이 진행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회자는 이 청소년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전 태극기집회에서 발언한 내용 때문에 SNS에서 또래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고 왕따를 당했다고 소개했다. 희귀한 ‘손자’의 발언에 ‘어르신’들은 열광했다. 19세 청소년은 마치 영웅이나 된 듯했다. 과연 그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짜뉴스를 보고 확신에 차 있는 듯한 모습에서 씁쓸함과 서글픔이 교차했다. 발언 사이사이에 군가가 울려 퍼졌다. 집회의 절반이 군가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60·70년대에 불러졌을 군가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성수기를 만난 셈이다. ‘어르신’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했을 노래들….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마치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에 임하는 병사들 같았다. 그들은 전쟁 향수에 동화돼 가고 있었다. 머리가 흰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나라를 구하러 와야지” 나라를 누구로부터 구한다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삼일절에는 탄기국측에서 광화문광장을 제외하고 세종로와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소에 대한 집회신고를 선점했다. 그 바람에 촛불을 들러 나온 시민들은 광화문광장 안에 고립됐다. 경찰이 충돌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광화문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 버렸다. 이로 인해 광화문광장으로 통하는 길은 광화문역 2·3·4번 정도가 전부였다. 탄기국은 이날 애국시민 500만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500만명이면 서울인구의 절반인데, 스스로 허수임을 자인하고 있었다. 이들은 탄핵 국면 상황을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 위반의 문제가 아니라 진영 간의 이념대립, 정치적 찬반논쟁으로 몰고 있었다. 마치 해방 직후 미소 강대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둘러싸고 충돌했던 찬탁과 반탁 대립을 떠올리게 했다.

이달 4일 오후 3시께 다시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시청역 2번 출구 대한문을 찾았다. 대한문을 중심으로 16차 탄핵기각 총궐기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역시나 서울광장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태극기가 가득했다. 한 연사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촛불을 든 자들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애국시민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나눠 준 미래한국 호외지에 “적색공포를 깨뜨려야 이긴다. 태극기 물결은 71년 만의 기적, 제2의 반탁 민족항쟁”이라고 썼다. 광고란에는 “대한민국 적화위기! 당신의 태극기가 나라를 지킵니다”라고 새겼다. 거리에는 “종북세력 때려잡고 대한민국 지켜 내자”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침략의 무리들이 노리는 조국”의 군가가 울려 퍼졌다. 이어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는 노래가 집회장을 감쌌다.

그사이 우리 부부 앞을 “우리 대통령님은 하늘의 천사이십니다”라고 적힌 팻말이 지나갔다. 촛불시민들은 ‘침략의 무리’들로, 국정농단의 몸통인 박근혜는 ‘하늘의 천사’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애국주의로 포장한 이 무지와 공포의 광풍을 부추기는 자 누구인가.

권영국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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