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건강보험의 착근과 제 역할, 노동해방을 위해 인생을 던진 사람. 수배 중에 모진 병을 앓다가 쓰러져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올곧은 해고노동자. 생전 못다 이룬 꿈의 완성을 지켜보기 위해 모란공원 언덕배기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건강보험공단노조 박동진.

박동진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89년 서울 동작구 의료보험조합에 입사했다. 89년 5월 서울지역의료보험노조가 창립되면서 초대 법규부장을 맡았다. 곧이어 70일간의 파업을 이끌고 90년 2월에는 지부 사무국장으로 열성적인 노조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해고됐다가 복직했다. 99년부터는 사회보험노조 서울본부장을 맡아 투쟁의 선봉에 서며 노조활동의 범위와 역할을 넓혔다.

2000년 6월 박태영 이사장이 부임하며 노조에 무쟁의 선언을 강요했다. 노조의 강력한 저항과 투쟁은 불을 보듯 뻔한 것. 노사가 정면충돌했다. 거대한 부패비리 집단먹이사슬로 조직화돼 있던 공단측은 공권력 투입을 요청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사회보험노조는 노조탄압에 맞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박동진은 선봉에서 싸웠다. 이 사건으로 두 번째 해고·구속을 당했다. 2001년 3월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석방된 박동진은 쉴 틈도 없이 같은해 5월부터 사회보험 해복투 공단 앞 농성과 현안발생 지부 순회투쟁을 했다. 10월에는 부패비리구조의 정점에 있던 박태영 이사장 이임식 저지투쟁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두 달 뒤 수배됐다.

수배 중이던 마흔 살 해고자는 늦깎이로 결혼했다. 안타깝게도 수배해고자의 신혼은 길지 못했다. 수배생활 도중 몸에 이상을 느꼈다. 하지만 체포 위험 때문에 병원을 찾지 못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4년 1월10일 충북 영동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간암 진단이 내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암세포가 그의 몸 곳곳에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해고노동자의 수배생활은 그 흔한 건강검진도 허락하지 않았다. 박동진은 "자진출두는 투항"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 사면조치 당시에도 수배자라는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됐다. 수배생활이 정처 없이 길어진 배경이다.

결국 그는 입원치료 대신 형 집에 숨어 요양을 하다 2004년 2월14일 숨을 거뒀다. 고단한 수배생활과 출생도 보지 못한 아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남겼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박동진의 슬픈 장례식은 공공연맹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발전노조 초대위원장 임기 마무리를 앞두고 있던 해고 2년차 필자는 장례식의 장례위원이었다. 수배해고자 박동진의 슬픈 죽음과 상당한 인과관계에 있는 박태영 이사장은 이후 전남도지사가 돼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시 인사와 납품비리에 연루됐다. 검찰조사를 받던 도중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이 뉴스를 자막으로 확인하며 말로 표현하지 못할 회한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이달 3일 새벽 필자가 박동진에 관해 모아 뒀던 자료를 검토하던 중 급한 문자를 받았다. 2000년 당시 박동진과 사회보험노조가 공권력 침탈을 저지하며 투쟁할 때 함께했던 김한상 위원장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비보였다. 모란공원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이 남긴 노동해방의 꿈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박동진이 투쟁했던 시절 이 땅의 사회보장제도는 착근과 역할 확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때였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나 사회일반의 제도에 대한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사회보험의 투명한 운영과 국민에 대한 온전한 기여를 위해 노조는 부패비리경영에 대한 견제적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부패비리의 구조적 병폐를 감추기 위해 노조탄압에만 골몰했던 낙하산 인사들과 하수인들로 인해 투쟁이 잠잠할 날이 없던 시절이었다. 박동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자신의 삶을 불태운 희생자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공단은 직장과 지역이 통합돼 건강보험공단이 됐다. 노조도 건강보험공단노조로 통합됐다. 사회복지의 중요성이 보다 강조되는 시대가 되면서 공단과 노조 모두 조직의 규모와 역할이 확대되고 온 국민의 높은 관심을 받는 상황을 맞았다. 박동진이 생전에 꿈꿨던 무상의료와 노동해방의 꿈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모란공원 열사묘역 박동진의 무덤 ‘새긴 돌’에 백기완 선생은 이렇게 쓰셨다.

"동진아. 어제도 흐르는 지하수 소리 들었지. 그게 바로 노동자들의 피눈물이라. 누워서도 똑바로 눈을 떠 사기꾼들의 장막 찢을 때까지 앞만 보고 가거라. 마침내 해방의 바다에서 우리 다시 만날지니. 동진아. 한이 맺힌 동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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