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2017년 대한민국. 촛불민심이 만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도 아직은 비루하고 잔인한 사회다. 대다수 취약계층 노동자들에겐 여전히 살맛 잃게 만드는 지옥이다. 무소불위의 권세로 군림하는 돈과 자본의 힘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용주들이 함부로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인 손배·가압류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 누적 손해배상액 1천600억원. 가압류 175억원. 노동자들은 저승사자처럼 막무가내로 압박해 오는 숫자에 가위눌린다. 헌법 제33조, 노동 3권은 자본의 노조탄압 무기로 전락한 손배·가압류 앞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엊그제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다시 낙망했다. 기술 먹튀자본인 이잉크에 항의하는 대만 원정투쟁에서 진행한 회사 임원 얼굴 사진에 신발 던지기 퍼포먼스가 모욕이라며 사측이 무려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심 법원은 두 노동자에게 25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사측은 원정투쟁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이상목 하이디스지회장에게도 기획·지시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사례는 아무리 억울하게 부당해고됐더라도 투쟁하지 말라는 것으로 손배가 어떻게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을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이런 정도면 뭐든 꼬투리 잡아 걸기만 해도 모욕에 해당하는 처벌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주의 부당해고만큼 노동자에게 모욕적인 게 없는데도 부당해고로 사용자가 손배를 당한 경우가 있기나 한가. 이건 한마디로 노조활동 하지 말라는 거다.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인 노동 3권을 법원 스스로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하이디스지회 조합원들이 대만까지 이잉크사를 찾아간 것은 한가하게 사주를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잉크와 한국 경영진이 조합원들에게 약속한 고용안정과 회사 발전을 지켜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절박한 심경으로 고심 끝에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잉크는 수차례 원정투쟁에도 대화에 아예 응하지 않았고, 부당해고된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항의와 분노의 표현이 평화적인 형태로 시위과정에서 표출됐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모욕이라고 손배가 인정된다면 노동자는 어떡하란 말인가. 현재 하이디스 노동자들에게 청구된 손배액만 27억여억원에 이른다. 손배·가압류는 억울하게 내몰린 노동자들을 두 번 죽이는 처사다. 노조 조직률이 10% 내외에 불과해 노사 역관계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손배·가압류는 노동자들을 옥죄고 노조를 탄압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다.

노동 3권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쟁의행위를 포함한 노조활동에 대한 손배·가압류는 헌법을 무시하고 노동 3권을 압살하며,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가는 악마의 제도다.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이디스에서도 비해고자인 배재형 전 지회장이 목숨을 잃었다. 사용주들은 으레 손배·가압류를 마지막 히든카드로 활용한다. 받을 수도 없고 받을 의향도 없이 노조를 없앨 수단으로 손배·가압류를 무차별 남발한다. 노조와 지도부는 물론이고 조합원들과 그 가족까지 대상으로 삼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거액의 인지대 때문에 소송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고 대상자가 노조를 탈퇴하거나 퇴사하면 손배를 풀어 주기도 한다. 돈으로 정당하게 노조활동 할 권리와 쟁의할 권리를 송두리째 박탈하는 손배·가압류는 현대판 노예제도다.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는 해고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숱한 손배·가압류 사업장의 노동자와 가족의 피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손배·가압류를 당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돈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포기해야 하는 게 더 무섭다고 토로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노조를 만들어 불의한 자본에 맞서 투쟁한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는 노동자가 사람이, 국민이 아니라고 윽박지른다. 법원은 하이디스를 비롯해 노동자가 기본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손배를 물리고, 가족의 집과 생계비가 담긴 통장마저 가압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최근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손배·가압류 철폐를 위한 입법 개정안이 발의된 만큼, 여소야대 국회에서 지체하지 말고 빠르면 2월 조기에 통과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노동적폐 중의 적폐인 손배·가압류 철폐 없이 일터의 평화는 없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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