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한때 나의 뇌를 지배하던 단어는 ‘파문’이었다. 삶을 오롯이 바쳐 온 노동운동에서 파문을 당해 쫓겨나거나, 노동운동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었다. 8개월 전 <매일노동뉴스>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던 시점의 상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진 파문을 당하지 않았고, 파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이 사회 상층 20%에 드는 양대 노총 조합원의 평균소득, 그중 상당수 조합원은 10%에 진입한 상황,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정규직노조, 비정규직끼리도 연대하지 못하는 상황, 최저임금 인상에 무관심한 노조들. 그래서 국민에게, 특히 청년층에게 손가락질 받는 노동운동 등 불편한 현실을 드러냈다. 노동운동가들이 술자리 따위 비공식·비공개 자리에서 한탄하며 열변을 토하는 내용들이다.

자본의 착취세상을 뒤엎고 평등세상을 만들겠다며 기세 좋게 출발한 노동운동이었다. 뒤에 남은 동지들이 만들 거라 믿고 숱한 이가 열사로, 희생자로, 아까운 목숨 내던지며 땅에 묻혔다. 그런데 지금의 노동운동은 평등세상은커녕 나날이 벌어지기만 하는 노동계급의 임금격차에서조차 무기력하다. 노동운동의 전제인 계급이 해체되는 상황이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데도, 입에 운동을 달고 살면서도 무능력하다. 패배할지언정 실패한 노동운동가는 되지 말자 약속했는데, 실패는 둘째 치고 한심한 삶이 됐다. “고생 많다. 그래도 너무 앞장서 싸우다 몸 다치진 말아라.” 격려하던 지인들이 “아직도 그 짓 하냐. 언제 정신 차릴래” 꾸짖는 신세가 됐다.

애초부터 직능 이익단체로 출발한 한국노총이야 그렇다 치고, 민주노총은 조합원만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닐진대, 노동운동은 그 늪에서 허우적댄다. 양대 노총의 중심부 조합원과 바깥의 대다수 주변부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는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자본이 꿈속까지 따라와서 비웃었다.

운동은 대통령 퇴진 그만 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투적이라는 판단이었다. 집회 문화 바꾸자고 주장했다. 집회 재미없다고 현장 여기저기서 아우성쳤다. 나도 재미없다. 운동이 알리바이 실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투쟁, 투쟁, 하면서 실제 투쟁에선 진정성 없는 운동을 지적한 거였다.

즉자적 총파업은 그만하자고 주장했다. 금속노조가 하네 마네, 그것도 현대자동차가 하네 마네로 귀결되는, 거기에 건설연맹 정도가 결합하는, 나머지는 자기 과제가 아닌, 그러다 내부 책임공방만 남는, 그래서 투쟁력을 배가시키지 못하고, 재벌·정부에 타격도 못 주고, 사회적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그런 투쟁 그만하자는 취지였다. 1시간이건 2시간이건, 70만 조합원이 국민과 소통하는 실천을 하자고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11월30일 총파업이 또다시 그걸 입증했다. 그래도 실제 퇴진 국면이라서 이전과 다를 줄 알았다. 한데 위력과 영향력은 농민 농기계 행진보다 못했다. 조합원 투표가 부결된 현대차지부는 파업에 들어가고, 가결된 기아차와 지엠지부는 대의원선거와 교육시간으로 대체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그마저 2시간짜리였다. 이런 상황이 10년 넘게 반복되고 있다.

민주노총 중심부 조합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그 돈으로 사회기금을 조성해 최저임금 1만원과 맞바꾸자고 주장했다. 임금 동결? 감히 그런 불순한 주장을! 그랬다. 1987년 이후 30년, 노동운동 흐름은 투쟁을 통한 임금 인상이었다.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는 동결하고 축소하는 일이 있었지만, 전체 노동운동 차원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이었다. 임금 동결은 전경련과 경총이 하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노동운동 내부에서 주장한다고? 어용과 변절자로 비난받을 만했다.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이들이 자본과 보수정치의 품에 안기기 전에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하던 주장이었다.

다행히 그런 비난은 받지 않았다. 고작해야 꼴통에 개량주의자란 비난이었다. 그마저 앞이 아닌 뒤통수에 대고 하는 비난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파문당하지 않았다.

파문당하지 않는 상황이 한편으론 서글펐다. 노동운동의 기세와 위력이, 노동운동가들의 결의와 의지가 그만큼 사그라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초라함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꿈틀거림과 현장의 고민이 읽혔다. 8개월이란 짧은 시간이었으나, 노동운동 안팎에서 반응이 왔다. 칼럼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노동운동의 현재 방식으론 더 이상 안 된다는 점은 일치했다. 현장에서 여러 실험을 진행하며 고민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노동운동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어도 흐름은 형성되고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 칼럼은 이어질 것이다. 여전히 때론 뜬금없고 황당한 주장을 펼칠 것 같다. 공개적으로 까이는 반론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염원한다. 그리만 된다면 더 망가질 용의가 있다.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바꿔 간다는 운동의 기본, 계급을 구축해서 평등세상을 만들겠다는 노동운동의 영혼을 살릴 수만 있다면.

9일은 평등세상을 염원하고 악질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며 산화해 간 배달호 열사의 14주기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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