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마치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빽빽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예수 뒤쪽에는 창을 든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고, 화면 오른쪽 하단의 짧은 머리 목수는 예수가 달릴 십자가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왼쪽 아래 세 명의 마리아(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근심의 눈길을 십자가에 던지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는 초록 옷을 입은 남자가 옷을 벗기려 하고 있고 그 바로 위엔 유다가 막 예수에게 배신의 입맞춤을 할 참이다. 이 모든 소란과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 침착한 모습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그리스 출신으로 스페인 톨레도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다 보면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저히 같은 시간대에 일어날 수 없었던 성경 속 사건들이 한꺼번에 묘사됐기 때문이다. 창검을 든 로마 군병들에게 막 체포당하는 예수를 그린 것인지, 배신의 입맞춤을 하려는 유다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처형장소로 끌려가 두 강도와 함께 옷이 벗겨지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영 아리송하다. 엘 그레코가 이토록 ‘신기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그리스의 이콘 화가 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77~1579년, 유화, 톨레도 대성당 성구보관실

엘 그레코가 크레타를 떠난 이유

이콘(ICON)은 주로 동방정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그림을 말한다.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세계 저편에 있는 신앙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기에 원근법도 필요치 않고, 각기 다른 이미지를 한 그림에 나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같은 사실은 17세기 러시아의 이콘을 봐도 알 수 있다. 성모 마리아가 가로로 누워 임종하고 있는데, 그 위쪽에는 벌써 어머니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보인다. 그리스도 품에 안겨 있는 성모의 크기 비례가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이콘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더 위쪽에는 이미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모가 그려져 있다. 시간대가 각각인 성모의 상황이 그림 하나에 동시에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정교회 특유의 이콘화에 익숙한 엘 그레코로서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속 여러 예수의 상황을 표현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엘 그레코의 그림은 단숨에 스페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경 속 예수가 겪어 낸 많은 고초가 한 그림 속에 압축돼, 사람들의 시선 속으로 육박해 오는 모습에 사람들은 혼이 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의 명성은 순식간에 퍼졌고, 그 인기에 힘입어 최소한 17개의 복사본이 엘 그레코의 화실에서 제작된 후 곳곳으로 흩어졌다. 당시에도 톨레도를 방문하는 사람은 여행의 필수 코스로 톨레도 대성당에 전시돼 있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을 관람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하니 당대 그의 인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무명의 외국인 화가가, 톨레도를 대표하는 명화가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의문 하나. 엘 그레코는 어쩌다가 멀쩡한 고향을 두고 이국의 땅 스페인에서 성공을 일구게 됐던 것일까.

엘 그레코는 1541년 그리스 크레타섬의 수도 칸디아(현 헤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크레타섬은 여전히 그리스정교회의 이콘 제작 전통이 남아 있었기에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엘 그레코가 이콘 미술을 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이콘은 정형화된 상징에 맞게만 그리면 되는 그림이었기에 예술가의 열정이나 개성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엘 그레코는 고향에 자신의 공방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이콘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으나 금세 사실성이 배제된 엄숙하고 딱딱한 양식에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엘 그레코가 고향을 등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엘 그레코는 말 그대로 ‘환골탈태’의 과정을 겪었다. 평면적인 이콘 화법은 바로 벗어던지고 원근법, 해부학, 유채 물감을 다루는 법 등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며 유럽적인 회화기법을 억척스럽게 익혀 나갔다. 하지만 화가로서, 고향에서 누렸던 만큼의 인지도를 금방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엘 그레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저 그런 무명의, 외국인 화가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작가 미상, <성모안식, 성모승천>, 17세기, 러시아 노브고르드 화파

동방 이콘화와 유럽 작풍의 만남

돌파구를 찾듯, 엘 그레코는 1576년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 어느덧 그의 나이 서른여섯.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티치아노와 미켈란젤로·라파엘로는 같은 나이에 이미 거장 칭호를 들었다. 하지만 엘 그레코는 부평초처럼 외국을 떠돌기만 했을 뿐 그에게 맡겨진 일거리는 변변찮았다. 그는 반드시 스페인에서 성공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리게 된 첫 그림이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그림은 스페인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실험작이었다. 짧은 시간에, 빨리 다른 대가들처럼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불안감은 그에게 용기를 심어 줬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전보다 한층 자유롭게, 소신대로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역시나 종교계의 논란을 불렀다. ‘불경하게도’ 군중 가운데 몇몇 얼굴이 예수 바로 위에 있으며,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세 명의 마리아들의 등장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가 터졌다. 계약금 400레알은 별도로 하고 잔금으로 엘 그레코는 900두카트를 요구했지만 교회에서는 겨우 잔금으로 227두카트만 지불하려 했다. 오랜 협상 끝에 결국 엘 그레코는 처음 요구보다 훨씬 적은 317두카트의 보수를 받아들였지만 그 조건으로 원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수정을 하지 않을 것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엘 그레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의 위대한 작품이 실제 가치보다 가격이 낮게 책정될지라도 내 이름은 스페인 미술 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말을 증명하듯 엘 그레코의 그림은 나날이 톨레도의 의사·성직자 등 지식층을 사로잡았다. 원근법과 비례 등 르네상스적 과학에 익숙했던 그들의 눈에는 동방정교회의 이콘화 전통을 슬쩍 융합시킨 엘 그레코의 표현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창백하고 무게 없는 환상과 신비의 세계, 휘몰아치는 색깔들의 조화, 기이하게 휘어지고 길게 늘어진 신체, 좀 더 고차원적인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인물들의 몽환적 눈빛….

1585년 9월 엘 그레코는 비예나 후작의 옛 궁전에 널찍한 ‘작업실’을 포함한 방 3개를 임대한 후 인기화가가 돼 차례로 주문을 소화해 내게 된다. 오랜 무명 시절이 무색하게 엘 그레코는 이윽고 방이 20개 넘는 저택을 마련해 호화롭게 살았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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