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연인원 500만명의 노동자 민중이 지지율 4%인 박근혜 파면을 요구하는 변혁적 시기에 떠오르는 사람.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그 딸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항일 독립투사. 요즘 유행어 중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평행이론’의 대비되는 두 사례. 대를 이어 승승장구했던 친일주구 집단과 그들에 의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제발 잊히기를 원하는 시대의 반역 흐름과 숱한 무명씨들. 거대한 일본제국주의 체제를 둘러엎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살고 죽었던 그 사람. 불멸의 전설로 남은 조선 노동운동가 이한빈.

이한빈(李翰彬)은 1905년 함남 신흥 출생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45년 11월 설립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위원장 허성택이 이듬해 5월1일 메이데이(노동절) 대회사에서 소개한 인물이다. 당시 메이데이 행사에는 20만명이 동대문운동장에 집결했다고 한다. 전체 인구나 노동자 대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설립 반년 만에 57만 조직이었던 전평의 위원장은 일제 치하 서대문형무소에서 105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 죽어 간 한 노동자의 애통한 죽음을 공개했다.

이한빈은 30년 6월 함남 신흥탄광 노동자 150여명이 탄광시설을 파괴한 사건으로 망명했다. 망명 기간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반을 수료했다. 일제의 추적에 의해 36년 검거된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형을 받아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서대문형무소 안의 강제수용소인 정치예방구금소에 다시 구금됐다. 일제가 41년 제정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 때문이었다. 예방구금령은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을 격리 수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이한빈은 감옥에서 "정치 운동자를 내놓아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 등 7개 요구를 내걸고 두 번 단식투쟁을 전개해 적지 않은 승리를 거뒀다. 일제는 미운털이 박힌 그에게 온갖 모략·위협·무고를 했고, 테러까지 자행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이한빈은 43년 3월1일 단식에 들어갔다. 일제는 단식 20여일이 지난 뒤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대한 반역자는 죽어야 한다"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단식 시작 105일 만인 그해 6월13일 이한빈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3일 전 뼈만 앙상하게 남았던 39세의 조선혁명가 이한빈은 감옥에 같이 있던 허성택에게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해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살아 나가거든 일제가 나를 죽인 것을 전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한빈의 처절한 투쟁을 전한 허성택 위원장은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해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라며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호소했다. 연설문의 제목은 ‘피투성이의 역사를 살리자. 강철같이 뭉치고 싸우자’였다.

일제 패망과 조선총독부 해체로 새로운 세상 건설을 향한 결정적 기회의 공간에서 전평은 그 결의대로 장렬하게 싸웠다. 물론 미군정의 탄압으로 역사적 소임을 마감했지만.

새 세상 건설을 향한 전평의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인민항쟁 70주년이 되는 2016년 현재. 부패하고 무능한 박근혜 정권 타도를 위한 노동자 민중의 거대한 항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땅 근현대사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45년 일제 패망,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에 이어 찾아온 삼세번의 기회인가. 군부독재에서 군부독재로 이어졌던 80년의 좌절과 87년의 한계까지 포함하면 4전5기의 기회인가.

노동자 민중은 다시 한 번 역사적 기회의 문 앞에 섰다. 삼세번이든 4전5기든 70여년 이어져 온 질곡의 역사를 한 번쯤은 바로잡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만약에 다카키 마사오 시대부터 박근혜 시대까지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면, 할 수 있다면, 이한빈의 꿈을 어느 정도 현실화할 수 있을까. ‘그 나물에 그 밥’인 제도정치권의 선수교체로 만족할 것인지, 훼절의 역사를 바로잡을 근본적 재설계와 실행계획으로 응전할 것인지.

역사는 100만, 200만 촛불로 표상되는 지금의 항쟁에 통찰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질곡의 한국 사회를 병아리 눈물만큼의 권력분점 내지 법 제도화로 신장개업하고 말 것이냐, 다 밀어 버리고 설계부터 다시 하는 재개발이냐의 문제다. 고난의 역사와 변혁적 정세는 이 시대의 노동자 민중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앙시앙 레짐의 현실 권력집단이 급속히 무너지는 짧은 기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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