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2003년 오늘, 11월16일 장례를 치른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그해 9월11일 추석연휴 기간에 태풍 매미로 35미터 고공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이 180도 돌아갔지만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던 노동운동가. 129일간 고공농성 사투를 벌이며 구조조정을 저지하겠다던 조합원들과의 약속을 목숨으로 지켰던 민주노조 활동가. 노동해방열사 김주익.

김주익은 1963년생이며 강원도 태백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82년 2월 대한조선공사 직업훈련소에 입소해 8월1일부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강원도 깡촌에서 국내 굴지의 회사에 취업했으니 가족들의 기대와 자랑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노조민주화를 경험했던 김주익은 90년 8월 대의원과 문체부장으로 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92년과 93년에는 수석부위원장·부위원장을 지냈다. 94년에는 역할을 바꿔 사무국장을 맡았다. 같은해 7월 LNG 선상파업으로 구속되고 강제 휴직됐으나 이듬해 8월 원직복직해 산업안전보건위원 역할을 수행했다.

96년 8월 대의원을 맡았고, 이듬해에도 연이어 대의원으로 현장활동을 전개했다. 2000년 11월에는 한진중공업 통합노동조합 초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중순께 회사가 인력체질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정리해고를 단행해 650여명의 노동자들이 희망퇴직·권고사직 등으로 길거리에 내몰리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대표인 김주익은 이때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전력산업 민영화 저지파업 중이던 발전노조에도 아낌없이 연대했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를 잊지 못한다.

연대의 인연으로 발전노조 간부교육을 오기로 약속했는데, 김주익이 85호 크레인을 걸어 내려오지 못하면서 아직까지 약속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대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하던 2011년 한진중 69명 부당해고 중앙노동위원회 심판회의를 필자가 맡았다. 당시 사무국장이 힘들었던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해 줘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중노위 심판회의장에서 이틀간이나 항의농성을 하면서 끝내 교섭을 끌어냈던 과정은 희망버스와 함께 잊지 못할 투쟁의 추억으로 남았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박성호 부산울산경남열사회 회장은 교육이나 집회 현장에서 만나도 자신들의 노조가 얼마나 어렵게 연대했는지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민주노조운동의 연대는 당연하다는 원칙을 실천적으로 고수한 한진중공업지회의 간부와 조합원들에게 전력산업 노동자들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02년 3월1일 시작된 단체교섭은 타결의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사측의 손배소와 가압류에 시달렸다. 김주익은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고발을 당해 그해 6월 다시 옥고를 치렀다. 11월에는 다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에 당선됐다. 필자의 수배와 구속, 그의 구속과 고공농성 등으로 엇갈리며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회의와 집회 등에서 서너 차례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를 격려했던 기억밖에 없다. 소주 한잔 나눌 여유로움조차 없었기에 그를 기억할 때마다 늘 가슴이 아프다.

2003년 6월11에 시작된 김주익의 고공농성은 노조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개별 조합원에 대한 손배청구 협박, 지회장이 내려와야 교섭하겠다는 사측의 태도로 장기화됐다. 어려운 현장 상황운 그에게 투쟁의 돌파구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10월17일 새벽 35미터 고공농성 129일차에 크레인 위에서 자신의 목숨과 투쟁 승리를 맞바꾸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진중공업지회 파업 88일 만이었다. 지회장의 충격적인 자결에 곽재규 조합원마저 수십 미터 독(dock)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연대가 한진중공업 사측을 압박했고 노사는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11월15일 찬반투표를 거쳐 16일 두 노동자의 참으로 애통한 장례를 치르게 됐다.

공장에서의 발인과 노제 후 부산역 영결식에 필자를 포함한 전국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당시 복직하지 못한 해고자 김진숙은 조사에서 "20년을 싸워도 못했을 걸 한꺼번에 쟁취했다는데, 축하한다는 인사도 축배를 나눌 수도 없는 참으로 서러운 승리. 번쩍 들어 헹가래를 쳐야 할 주인공을 땅에 묻어야 하는 이상한 마무리. 시신 하나는 수십 미터 크레인에서 끌어내리고 또 하나는 수십 미터 독 바닥에서 끌어올려 치르는 이 기가 막힌 장례식"이라고 말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박근혜 게이트로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현 시국. 국격을 시궁창에 처박은 박근혜·최순실의 공범이자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또 다른 축인 재벌들의 행위가 이러저러하게 등장한다. 한진과 경영진의 이름도 언급된다. 뉴스를 보면서 박창수와 김주익 등 열사들과 해고자들, 조합원들이 문득 생각났다. 그들의 지난 30년은 극복해야 할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희생을 강요당하고 탄압받았던 나날이었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과 ‘한국 자본주의 체제 극복’을 꿈꾸며 실천했던 김주익. 그의 치열했던 삶과 원통한 죽음을 기록하는 오늘 묻는다. 이 결정적 정세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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