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사과말고 사퇴하라.” 지난 5일 광화문광장에서 분노의 촛불을 든 시민들은 외쳤다. 서울 20만명, 전국 30만명의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은 그만 사과하고 물러나라고 분노해서 외쳤다. 지난달 25일에 이어 이달 4일에 다시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 대해 시민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종로·을지로·충무로·명동·서울역·남대문·서울광장으로 다시 광화문광장까지 서울의 광장과 거리는 시위행진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물결을 이뤘다. 경찰이 한 거리행진 금지통고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도 경찰병력으로는 막지 못했을 정도로 이날 분노는 거대했다. 노조 깃발을 든 노동자, 학생회 깃발을 든 대학생, 그리고 어떤 깃발도 없이 참여한 일반 시민·중고생, 심지어 부모와 함께 나온 초등학생까지 각양각색의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도대체 얼마만인가.



2. 지금 대한민국은 야단이다. 위기라고, 헌정 중단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야단이다. 위기 앞에서는 여도 야도 없이 한통속이다. 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청와대와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만이 아니다. 김병준 총리 내정 철회, 국회에서 합의한 총리 임명, 거국중립내각,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탈당….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심지어 새누리당의 비박계까지 이런 위기 수습책을 받으라고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심복인 새누리당 친박계에 요구하면서 빨리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고 있다. 날마다 신문과 방송에서 뉴스로 끊임없이 중계되고 있다. 그걸 보자니 나는 새가슴이 될 지경이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대한민국은 뭔가 사단이 나서 망하게 될 것처럼 위태롭다고 야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시민들의 일은 아니다. 위기 수습책이라고 그들이 내세운 어느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할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가진 자의 일이다. 최순실 사태로부터 시작된 현재 위기는 대한민국 권력의 위기인 것이다. 그 위기의 날에 대한민국 국민은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대표를 선출하는 게 전부였던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느닷없이 행동에 나섰다. 지금껏 권력자들에 맡겨 놓았던 일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대통령은 물러나라고 하고 있다.



3. 국민은 주권자라고 선언하고서 근대의 세상이 열렸다. 시민혁명에 의해 봉건권력을 심판하고서 국민주권의 헌법체제를 도입했다. 우리가 오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적들에 맞섰던, 저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수백년의 시민 혁명과 전쟁을 통해서였다. 민주공화국은 자신을 부정하는 권력자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고서 건설되고 유지돼 왔던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선언될 수 있었다. 그리고 주권자 국민에 의해 선출한 대표자로 정부를 구성해서 국가를 운영해 왔다. 국회의원·대통령 등 대표에 의한 대의제 국가운영의 원리는 국민이 직접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기 어려웠던 조건에서 국민주권주의라고 받아들였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시민혁명 당시에 유산계급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일정 연령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보통선거권이 보장되고, 대표 선출행위뿐만 아니라 국민투표 등에서도 주권자로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더는 국민배제의 주권주의를 국민주권주의라고 사칭할 근거는 사라졌다. 국민주권주의가 아니라 인민주권주의여야 한다고 내세울 이유가 없어졌다. 기껏해야 국민 모두가 직접 행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유말고는 이제 이유는 없게 돼 버렸다. 쉽지 않아도 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더는 이유가 없게 됐다. 무엇보다도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한 헌법은 헌법제정권력자로서 국민의 존재를 전제로 정당할 수 있는 것이니, 국민은 국가 최고권력자 대통령 위에 있고, 헌법 위에 있는 주권자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 1948년 7월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해 개정한다”고 선언한 대한민국헌법의 전문도 주권자로서 대한민국 국민을 선언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주권자로서 국민이 했던 행위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은 대통령·국회의원 등 대표를 선출하고서 정부를 구성·운영하도록 하는 등 국가운영의 원리를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취임 선서를 한 대통령에 대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탄핵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이 정하고 있다(제65조). 지금 이 나라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헌법 규정에 근거한 것이다. 탄핵은 국회의 의결에 의한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행해진다고 헌법상 제도로 규정돼 있다. 그러니 탄핵 주장은 헌법이 정한 질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헌법 위반, 법률 위반을 처리하자는 것이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직접 대통령을 심판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라는 국회의원들과 헌법재판관들에 의한 대통령 심판행위인 것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의 농성장을 찾아와 박근혜 대통령을 국민의 뜻에 따라 탄핵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눴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해서 국회의원들의 탄핵 소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상 절차에 따른 대통령 심판행위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헌법상 탄핵절차로 대통령을 심판한 적도 한 번 없었다. 거기서 국민은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는 관중일 뿐이다. 대한민국헌법의 탄핵제도에 국민의 행위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을 심판해 왔다. 비록 헌법에는 국민이 대통령을 심판하는 행위를 규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주권자로서 국민은 헌법을 초월해서 최고권력자 대통령을 심판해왔다. 이승만 독재권력을 심판한 4·19혁명이 있었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심판한 6월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승리한 심판행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군홧발에 국민의 민주항쟁은 처절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런 한국 현대사로 보자면,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그 정권에 대한 심판은 탄핵이라는 헌법제도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행동으로 주권자의 의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탄핵이 아니라 주권자 국민이 광장과 거리에서의 행동으로 최고권력자를 심판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에서 최고권력자를 심판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국민은 주권자로서 자신이 직접 행사하는 것이라고 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대한민국의 광장과 거리에서 수십만명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주권자로서 국민의 행동이다. 그렇다면 환호하고 박수를 쳐야 할 일이다. 위기라고 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빨리 헌법질서가 회복돼야 한다며 야단을 떨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모처럼 국민이 직접 주권자로서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겠다는 데 그걸 위기라고 막겠다고 할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위기 수습일지 몰라도, 국민에겐 간만에 주권자로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간해선 없었다고, 이게 얼마 만이냐고 기뻐할 일이다. 그들에겐 위기겠지만 국민에겐 축제인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에 태어나 국민이 됐나"하고 낙담할 일이 아니라 광장과 거리에서 “사과말고 사퇴하라”고 춤추며 노래할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노동자는 어떻게 노래하고 춤춰야 하나.



4. 수많은 노조 깃발이 있었다. 광화문광장에 노조 깃발을 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화문광장의 집회는 수년전부터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중총궐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 최근 최순실-박근혜 사태로 그야말로 시민총궐기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이번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없다. 오늘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시민의 대오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민의 하나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로서 행동하고 있지 못하다. 노동자 자신의 권리로 보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든, 탄핵이든, 2선 후퇴든 거기서 노동자는 없다. 무엇이든 권력자를 바꾸는 것이지 노동자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일이 아니다. 거기서 노동자의 지분은 없다. 이런 일이라면 그저 시민 속에 파묻혀 함께 외치면 그만이다. 굳이 노조 깃발을 들고 나올 것도 아니다. 분명히 오늘 박근혜 퇴진 투쟁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 노조 깃발이 있어도 노동자는 없다. 그저 민중총궐기에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할 뿐이다. 그런데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자신을 놓쳐서는 안된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지금 노동자로서 박근혜 퇴진 투쟁을 전개하지 않지 않는다면 투쟁의 결과에서 노동자가 차지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이번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 반드시 노동자의 특별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대오를 유지하고 노동자로서 하나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회 시위든, 총파업이든 노동자의 깃발 아래서 공화국의 적, 박근혜 권력을 심판하는 자가 노동자라는 걸 분명히 보여 줘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탄핵, 2선 후퇴, 그 결과에 만족하고 춤출 것이 아니라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박근혜 퇴진 투쟁을 전개하는 행동에서 기뻐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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