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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 ‘진화’의 기원, 그리고 도제학교김성호 공인노무사(성동근로자복지센터)
▲ 김성호 공인노무사(성동근로자복지센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는 아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어느 특성화고 3학년 교실에서 ‘진화’를 했다. 2012년 서울 광화문의 한 빌딩 벽에 걸려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었던 시구 중 “너도 그렇다”를 “너는 아니다”로 바꾼 것이다. 그 문구를 본 사람이 반 학생들에게 그 의미를 물으니, 3학년 2학기까지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들에게 ‘취업 안 나간 너희는 안 예쁘니 어서 취업하라’는 뜻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먼저 취업해 나간 친구들을 보며 안 그래도 마음이 착잡할 학생들에게 이제는 교실까지 비우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특성화고는 1998년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에 따라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해 설립됐다. 초기에는 기존 전문계고에서 ‘우수’한 학교들을 선정해 운영하다 그 수가 확대돼 다수의 전문계고 고등학교가 특성화고로 전환됐고, 결국 2012년에는 모든 전문계고가 특성화고로 통합된다. 전문계고 중 일부를 특성화해 육성시키겠다는 계획이 전문계고를 특성화고로 일률적으로 통합하는 결과로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특성화고는 ‘특성화’되지 않은 채 그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받게 됐다.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취업을 향한 끝 모를 달음박질은 누구를 위함인지 알 수가 없다. 학교 예산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취업률에 따른 인센티브가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을 옥죄고 있다. 실업률이 높아만 가는데 특성화고 취업률만은 계속 올라가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보면 진학률로 평가받는 일반계고의 끝없는 달음박질과 일면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한시라도 빨리 취업 현장에 내보내진 학생들은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학생으로서의 보호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어느 하나 보장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실상 강제노동 상황도 발생한다.

“특성화고 3학년 경영과 전공인 A씨는 선생님이 권유한 조리업체 면접에 붙었으나 자신의 전공, 진로계획과 달라 해당업체 취업을 포기했다. 하지만 개학 후 선생님의 구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B씨는 업무가 고돼 일하다 쓰러지기까지 했고, 그래서 학교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담임선생님이 사회에 나가 쉬운 일은 없으니 ‘이 정도’는 극복해야 한다며 복교를 반대했다.”

“관광경영과를 졸업한 C씨는 ○○텔레믹스라는 업체에 전화상담 업무로 현장실습을 나갔고, 일하는 동안 상대방의 욕설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 졸업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사를 그만뒀다.”

어느 곳에서도 온전한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당한 권리침해를 ‘감내’하는 것, 최대한 버티다가 졸업 후 그만두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세상의 노동을 권리침해부터 인식하게 됐던 경험은 상흔이 되고 있었다.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목적으로 뒀던 특성화고 교육이 교육으로서도, 노동으로서도 자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정부는 ‘산학일체형 도제학교’라는 카드를 꺼냈다. 2학년부터 2년간 학교와 사업체를 오가며 현장 적응능력을 제고하고, 취업을 연계해 청년실업을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2015년부터 시범운영하던 것을 내년에는 200여개 특성화고로 확대하겠다는 발표도 했다.

그러나 학교현장 목소리는 아직 차갑다. 제도 시행 초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장실습조차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도입되는 이 제도는 그 근본에서 취업률을 높이는 기존 방법과 유사한 시스템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사업체로 내몰리는 학생들, 교육의 공간으로 운영되지 않는 사업장, 교육과는 거리가 먼 비숙련 단순업무들. 그 속에서 현장실습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막내’로서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자리 문제를 노동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교육의 문제로 전가하고 있는 듯한 정부의 행보, 조금이라도 저렴한 노동력을 찾기 위한 기업들, 취업률 경쟁에 옴짝달싹하기 힘든 학교가 그 기만의 연쇄 고리를 ‘생존’시키기 위해 새로운 진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만일 이 진화의 방향이 청소년의 삶과 인권을,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송두리째 잡아먹는, 잔인하고 인간미 없는 포식자가 돼 가는 방향이라면 우리는 이 진화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단시켜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차별과 배제의 언어로 학생들이 ‘교실’에서조차 ‘소개(疏開)’돼 버리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 페이스북 페이지 ‘일하는 청소년, 할말it수다’ 게시물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김성호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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