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선배들과 소위 자녀 상담 비슷한 걸 가끔 하게 된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20대 초·중반 자녀와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을 본다. 각자가 바쁜 일상을 살고 있기에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을 충분히 낼 수 없는 조건 때문일 게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부모와 자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언어 차이가 크다. 나는 보통 선배들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당위가 이 차이를 무마시킬 수는 없다고 이야기 한다. 간극을 인정하고 좁히기 위한 노력이 의식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속해 있는 20대의 부모세대는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청춘을 보냈다. 당장의 형편은 충분치 않아도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낙관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맨주먹으로 열심히 노력해 내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꾸리며 한국의 ‘중산층 신화’를 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설령 중산층 신화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했더라도 내 자식은 자기처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부모세대의 절박함은 각자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유예시킨 강력한 동기였다.

부모세대가 유예한 행복은 자식세대의 부채감으로 대물림된다. 많은 청년들이 “내가 젊었을 때나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건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종류의 말을 들으며 자랐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잠든 부모님의 어깨가 측은하게 보일 즈음부터 우리의 마음에는 빚이 쌓여 간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은 성공한 삶에 대한 우리 세대의 기대,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적절히 버무려져 탄생한 통계치일 것이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마주한 세상은 형편없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취업으로 가는 문은 좁아져 갔다. 친절하게 쓰인 불합격 통지서는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경멸로 읽힌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또래 세대와의 경쟁에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무너져 간다. 취업에 성공했다고 인생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직장 상사는 요즘 경기가 어렵다며 후임들이 자기 존재를 혹사시키길 원한다. 대학 대신 곧바로 공장과 백화점·마트를 오가며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이름 모를 또래들이 몇 년 일찍 겪어 온 삶이다.

내가 만난 한 조합원은 학교를 졸업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교수님으로부터 취업을 했냐는 확인전화를 받았다. 사려 깊은 전화라기보다는 재촉에 가까웠다. 학교의 취업률이 저조해진다는 이유로 ‘너는 실업 상태로 있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어디든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첫 직장이 됐다.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이 부푼 꿈과 열정을 자극하기보다는 모멸감과 두려움을 안기는 시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당사자의 상처는 가족·학교·사회라는 공동체와의 연결 고리를 위협한다. 벌써부터 보름 앞으로 다가 온 추석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취업해야 하지 않겠냐’는 재촉이 아니라, 더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해도 괜찮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닐까. ‘힘들겠다’는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지금의 청년들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함께 고민하면 어떨까.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지금 나의 상황이 부모님께 미안하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불쌍하니까 도와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 사회가 보내야 할 최소한의 반응과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방향은 개별적인 가족 공동체의 자구적인 노력이 아니라 국가 제도의 혁신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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