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내친김이라 했다. 불편한 얘기를 또 꺼내겠다. 글을 쓰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친한 동료들의 얼굴이 스쳤다. 집회가 재미없는 것은 모두의 책임이지만, 직접 관련된 이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했던 일 탓에 워낙 많은 욕을 먹은 터라, 일면식이 없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의 욕은 쌍욕이라도 개의치 않는데,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삐치거나 욕을 하면 무지 아프다.

이 글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쓰기로 결심한 것은 혁신에 대한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지금의 운동은 혁신을 혁신해야 할 만큼, 10년 넘게 혁신을 부르짖고서도 제자리걸음이다.

혁신은 말 그대로 껍데기를 벗기는 일이다. 피가 철철 흐르고 고름이 맺혀 터진다. 고통에 몸부림친다. 계속 벗길까 멈출까 혼란스러워진다. 그것을 감내할 때 혁신은 성공한다.

지금까지 우리 운동은 혁신의 고통과 혼란이 두려워 껍데기 벗기는 길을 회피했다. 기껏 화장품 바르고 머리카락 심는 수준에 멈췄다. 욕먹는 게 두렵고 귀찮아서 하던 대로 했다. 혁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집회문화가 있다. 집회가 재미없다는 것은 10년도 더 된 얘기고 지금은 술자리의 단골 안주가 됐다. 매번 똑같은 판에 똑같은 연사에 똑같은 노래에 똑같은 내용에, 지긋지긋하단 말까지 나온다. 어버이연합 집회의 좌파버전이란 비아냥까지 나온다. 실제 밑바닥 국민의 눈엔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첫째, 무대에 서는 연설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때에 따라선 길게 해야 하지만, 일상적으론 말 좀 짧게 하자. 본인에겐 그날 한 번의 연설이지만, 듣는 사람들에겐 반복되는 연설이다. 대부분은 연설 내용에 귀 기울이기보다 언제 끝날까 구시렁대고 있다. 연설자도 밑에 있으면 그러지 않나? 참가자들을 고문하지 말라. 연설은 머리에 뭔가를 심어 주는 게 아니다. 오랜 여운이 남도록 한 가지 굵고 짧게 가슴을 때리는 것이다.

둘째, 맛깔스런 소재로 연설을 시작하면 어떨까. 책의 한 대목도 좋다. 인기 있는 영화나 TV드라마도 좋다. 직접 목격한 밑바닥의 절절하고 구체적인 삶이면 더 좋다. 본인의 경험과 고민이면 더욱 좋다. 단어 몇 개 바꾸면 누구나 똑같은 연설 말고, 지금 여기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연설을 하라는 얘기다. 밑에서 들어 보라. 대회사·투쟁사·연대사·결의문, 거기다 사회자 발언까지 거의 똑같다. 취재하는 홍보담당이 그런다. 받아 적을 게 없다고. 집회장의 많은 이가 그런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안다고.

셋째, 말 좀 쉽게 하자. 온통 개념어 천지다. 한 사람의 연설에서도 투쟁, 단결, 쟁취, 저지, 파업, 박근혜, 퇴진 따위가 수없이 반복된다. 심지어 어떤 연설자는 그 단어들을 빼면 1분으로 충분하다. 그런 연설이 누구 귀에 박히겠는가. 땡볕이나 칼바람 속에서 그런 연설을 5분 넘게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욕이 맴도는 것은 당연하다. 최고의 연설은 투쟁 등의 개념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듣는 사람이 투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연설이다. 목소리 높여 투쟁을 외친다고 투쟁이 되는 게 아니다. 투쟁의 폭발 상황이 아니라면, 개념어 나열은 연설의 울림과 감동을 오히려 깎아먹는다. 20세기 최고 명연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마르틴 루터의 연설문 ‘나에겐 꿈이 있다’를 보라. 우리끼리만, 그것도 소수 간부와 활동가끼리만 쓰는 단어들을 제발 줄이자.

넷째, 무대에 서는 문화일꾼들에게 당부한다. 발언을 자제하면 어떨까. 특히 여러 문화일꾼이 각각 올라가는 집회에선 역할을 분담해서 한 사람만 발언하면 어떨까. 반복된 연설에 지쳐 있는 참가자들에겐 고역이다. 이렇게 얘기했다가 욕을 먹은 적이 있다. 문화일꾼은 노래와 율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땐 찍소리 못했는데 이젠 해 볼까 한다. 발언이 아닌, 노래와 율동과 연극 자체가 연설이다. 연설자는 연설자고 문화일꾼은 문화일꾼이다. 무대에 한 번 못 선 채 묵묵히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 발언은 필요할 때만 깔끔하게 하면 된다. 그럴 때도 이전의 집회에서 했던 발언과 똑같은 내용은 삼갔으면 한다.

다섯째, 집회 기획자들에게 당부한다. 직간접으로 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삼시 세끼 365일 똑같은 반찬만 먹으면 환장하지 않겠나. 사업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노조는 아마 식탁을 엎을 것이다. 가끔이라도 파격을 가져 보면 어떨까. 예를 들면 무대에 오른 대표자가 노래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 발언은 딱 1분만 주고 말이다. 뽕짝을 맛깔나게 부르는 조합원을 무대에 세우는 것은 어떨까. 소녀시대의 다만세를 발랄하게 부르는 조합원을 세우는 것은 어떨까. 가사에 투쟁 단어가 없다고? 엄혹하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님께서 가신 길은 빛나는 길이옵기에’로 시작하는 아내의 노래를 부르며 투쟁만 잘했는데? 그 노래 부르며 감옥에도 갔는데?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범국민대회에 정작 밑바닥 국민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난무한다는 것을. 전국노동자대회 참가대오들은 시작 전부터 무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동안 무던하게 참아 주던 대오에서 항의가 시작됐다는 것을.

써 놓고 보니까, 매우 거칠다. 그러나 시작하면서 밝혔듯 각오하고 내뱉는다. 그러나 우리 집회문화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원인이 있다. 계몽주의와 군사문화의 영향이다.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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