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 전 KBS 이사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낸 소설가 복거일씨가 최근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내건 경제민주화 공약이 새누리당의 정체성을 흔들어 놨고, 경제에도 나쁜 영향을 줬다고 한 모양이다. ‘포용적 시장경제와 새누리당의 진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김희옥 비상대책위원장과 김광림 정책위의장, 김종석·전희경 의원, 임윤선·오정근·민세진 비상대책위원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

새누리당 안에 적지 않은 파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직관이 든다. 참석한 이들의 면면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첫째, 단지 표를 얻기 위해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을 내용을 마구 질러대 야당의 의제를 새누리당이 선점했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하지만 이런 이슈의 선점은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표를 얻기 위한 헛된 약속은 ‘당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우아한 말로 번역된다. 이건 정직하지 못한 수사법이다. 툭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갖다 붙이는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하면 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이었을 가능성이다. 이게 내게 다가오는 직관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저 ‘혼돈’(?)이 새누리당 안에서 꽤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정리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친다는 점이다.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면서 경제민주화 관련 말들을 접고 야당이 하는 정책 제안과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들고나올 카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한 카드였던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구호는 ‘세계경제가 이 모양인데 사기 치고 있네!’라는 조롱거리가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새누리당의 이런 딜레마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됐다고 다가온다. 이슈 선점 효과의 재미를 일찌감치 톡톡히 본 처지로서는 어떻게든 정당성과 필요성을 훼손시키는 대응을 하기 마련이다. 성남시가 시행하고 있는 청년판 기본소득이나 서울시가 도입하려다 제동이 걸린 청년수당 정책이 바로 이런 예다. 보건복지부가 자신들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우기며 직권취소 결정을 내린 청년수당 정책은 결국 대법원에서 도입 여부가 판가름 날 전망이다. 복지부는 사회보장기본법에 규정된 ‘협의’를 ‘합의’로 풀이하면서 ‘합의하지 않았으니 직권취소’ 결정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성남의 청년판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왜 제동을 걸지 않았는지도 이때 알았다. 기초자치단체의 복지 관련 정책에는 직권취소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지방자치법 제169조 참조).

복지부가 들이댄 논리는 ‘도덕적 해이 초래’니 ‘선심성 복지정책 조장’이니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여기에 전폭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포퓰리즘’이라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대응이다. 버젓한 일자리가 태부족하고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넘쳐나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창업 정책만이 청년실업을 완화하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성남의 청년판 기본소득제와 달리, 직장을 잃은 뒤 적용되는 구직급여를 직장을 얻기 전에 적용해 보자는 정책 발상이다. 성남의 청년배당은 일종의 시민소득에 가깝다. 하지만 동일한 맥락이다. 일자리 태부족의 현실에서 일자리를 얻고 최소한의 생활을 하기 위한 청년의 고통을 줄여 보자는 것이다. 보험료를 내야 연금 자격이 생기는 사회보험인 국민연금의 맥락에서 벗어나 기초노령연금(노령수당) 정책을 발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청년수당이나 청년배당은 부모세대가 자신의 노후에 대비하거나 현재소비를 늘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주는 간접적인 효과까지 낳는다.

그럼에도 온갖 무리한 비난을 퍼부어 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해야 하는데 왜 네들이 하느냐?, 못마땅하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 성남시와 서울시는 ‘눈에 박힌 가시’다. 도입을 못하게 하기 위해 이들 지방자치단체의 재원을 중앙정부로 빨아들이려는 시도까지 무릅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에서 전례 없는 일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소득세와 법인세 인상안에 대한 새누리당의 반응에서 딜레마가 엿보인다. '우리가 해야 하는데 왜 네들이 하느냐?'는 불만이다. “경제가 어려워 추경까지 내놓는데 개인과 기업의 세금을 어거지로 거둬들이겠다는 것에 반대한다. 표만 의식하는 행위”(김광림 정책위읜장)라는 것이다. ‘법인세율을 올리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근로소득 면세비율이 48%나 되는데 이것부터 바로잡는 게 순서’라는 게 핵심 반대 논리다. 새누리당의 반대 속에서 ‘천기누설’이 하나 있다. ‘표가 되는 정책’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최상위 계층에 대해서는 법인세율을 좀 끌어올리고 소득세율 구간을 하나 더 신설하는 것의 효과는 표도 되고 5천억원 정도(새누리당 계산) 세수도 더 생긴다.

문제는 우려인데, 우려가 타당하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최상위 기업들 중 법인세율 2% 높인다고 '해야 할 투자'를 안 하는 기업들은 단언하건대 없다. 여러 나라 사례에서 보면, 소득세 최고세율 신설은 최고소득층의 현재소비를 줄이는 효과보다는 저축의 일부를 세금으로 돌리는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근로소득 면세비율을 축소하려 할 경우 저소득층의 현재소비를 줄이는 악영향을 줄 위험성이 훨씬 높다.

‘좋은’ 정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안을 찾는다. 현실은 내버려 둔 채 남을 비방하면서 정체성만 강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은 ‘도그마’(교조)다. 상상력이 고갈을 낳는 그런 나쁜 정치는 반드시 ‘넌 뭘 하려 하는데?’라는 물음에 부닥친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남과 나를 기준으로 불륜과 로맨스를 나누는 시대가 아니다.

그것이 자본소득 과세의 강화이든, 소득세의 누진율 강화이든,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의 제어를 통한 중소 상공인의 기반 강화이든, 구조조정 과정에서 권한과 책임의 조화를 위한 제도의 도입이든, 경제민주화의 요구와 필요는 2012년 대선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는 그 약속 이행의 촉구였다.

전 KBS 이사 (cjsang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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