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민주화(democratization)는 사회과학적으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 과정에는 제도 변동과 인식 변화가 어떻게 상호 연계돼 이뤄지는지, 양자 간의 결합과 균열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거기에 작용하는 우연적 요소는 무엇이며 문제적 행위자는 누구인지 등에 대한 풍부한 경험사례가 담겨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짧은 시간 동안 다 겪은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된다면, 한국에서 그 시기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필자와 같은 이들은 본의 아니게 매우 값지고 행운스런 사회과학적 경험자원을 보유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장년기에 접어들면서는 민주화 퇴행까지 지켜보다 보니, 한 사회의 역동적 변동 양상의 끝판이 바로 이 시대 한국 상황에 담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국이야말로 사회변동 연구의 엄청난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저개발국들이 빈곤 탈피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한국은 적어도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게다가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까지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요인 중 하나로 관료집단 역할론이 있다. '서울대 출신, 고시 합격'이라고 하는 공통의 입문 허들 통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균질적인 관료집단이 서로 높은 신뢰를 공유하며 실력과 청렴성을 갖추면서 연속성 있는 정책 형성과 집행을 이뤄 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있다. 바로 정부가 추진한 저임금 정책과 집단적 노동권 박탈이라고 하는 조건이다. 초과착취와 노동배제라는 정책적·정치적 기조(streamline)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주로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의 개발국가론자들(developmental state theorists)이 기능론적 관점에서 첫 번째 요인에 관심을 뒀다면, 마르크시즘의 세례를 받은 같은 시기의 한국 학자들은 갈등론적 관점에서 두 번째 요인을 강조했다. 두 가지 설명논리 모두 현실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일정하게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권화된 관료들에게 의사결정을 일임하고 노동하는 대중들의 무권리 상태를 유지하는 식으로 경제성장에 매진했던 과거 한국의 이른바 개발독재체제는 민주화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이행은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 정도까지 약 2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그렇게 이룩한 민주화를 다시 되돌리는 퇴행적(regressive) 정치가 발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민주화에 젖은 대중들이 본능적으로 그러한 퇴행성을 견제하고 있기에 탈민주화의 문화적 쿠데타가 전면화되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상을 지켜보면서, 민주화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변화, 그것과 지배(domination)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싶다.

지배라고 하는 사회현상은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이데올로기를 요한다. 정당화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정상적이고 무엇이 예외적인 것인지를 가르는 잣대로 작용한다. 민주화는 당연한 것이 무엇이냐, 정상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해 감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개발독재시대 관료만능주의와 노동권 박탈은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됐고, 그를 통해 자신의 정상성(normality)을 사회에 강요했다. 민주화는 그렇게 과거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고 주창되던 것이 사실은 예외적인 것이었으며, 한낱 지배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폭로하면서 새로운 행위정향(behavioral orientation)의 원리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지금 민주화 퇴행기를 맞이해 다시금 관료만능주의와 노동권 제약이라고 하는, 예외화됐다고(exceptionalized) 생각된, 낡고 해묵은 그 시절의 정상성이 재등장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창하는 양상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민주화의 ‘고기 맛을 본’ 대중들에게 구시대적 정상성들의 고개듦은 어색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넓게 보아 다 같이 그러한 맥락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정상성과 예외성의 새로운 자기정당화 게임과 갈등이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성주에서, 갑을오토텍 사업장에서, 이화여대 교정에서, 그리고 너와 나의 일터 구석구석에서 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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