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한 김유선의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에 따르면 임금불평등, 즉 노동자 상위 10%와 하위 10%의 임금격차는 2014년 5배에서, 2015년 5.25배를 거쳐, 올해엔 5.63배로 가파르게 벌어졌다. 한두 해 뒤엔 6배를 돌파하고, 머지않은 시점에는 10배로 벌어질 것이다. 이미 노동자는 하나의 계급이 아니다. 우리의 머릿속 허상에서만 동일계급이다.

솔직히 우리 실력으로 투쟁·재벌·파업·퇴진만 걸어선 턱도 없다는 판단이다. 뭔가 판을 뒤흔들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이 없을까 궁리한다. 아직까진 투박한 수준의 구상 단계다. 고민의 일단을 풀어놓는 정도다. 편한 자리에서 동지들에게 꺼내 물어보며 다듬고는 있다.

재계에서 노사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구상의 일단을 넌지시 던져 봤다. 재계 태도를 예측할 필요가 있었다.

"연소득 일정기준 이상의 노동자들 임금을 수년간 동결한다. 동결분은 사회기금으로 내놓는다. 재계는 당연히 더 풀어야 한다. 부유세와 강도 높은 누진세를 통해 모든 국민이 참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재편기금’의 목표는 1차로 100조원이다. 재편기금으로 비정규직, 중·소 영세하청, 영세상인, 청년, 노인 등 막장에 이른 한국 사회 불평등과 일자리 문제 등을 풀어 나간다. 기금 운용방향은 노사를 비롯한 각계각층 대표들이 모여 논의하고 합의한다."

사전에 입을 맞췄나 싶을 정도로 한결같이 “재계는 못 받습니다” 라고 했다. 누가 그걸 총수에게 얘기할 수 있겠어요, 바로 모가지 날아갈 텐데, 라고 했다. 애 키우는 부모로서 적극 동의는 합니다, 라는 반응도 있었다. 사회에서 명함깨나 내민다는 대기업 노사업무 담당의 대학 나온 자식조차 알바에 비정규직인 세상이었다.

그들은 재계가 더 내놓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걸렸다. 일단 살아 있다 치고, 삼성 이건희 회장처럼 아무 일 하지 않고 받아 간 배당금은 대폭 내놓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도 걸렸다. 지난해에만 1천700억원이었다. 부유세도 걸렸다. 그런 것들을 누가 총수에게 보고해서 합의하자고 하겠냐는 거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들 임금도 수년간 동결될 테니, 총수 핑계 대며 못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노사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아할 수 있는데, 노사관계엔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게 있다. 노사가 세게 싸우면서도, 몇몇 지점에서 일치하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임금투쟁이 그렇다. 노사업무 담당들이 교섭 석상에선 인상 폭을 줄이려 애쓰는 것 같지만, 내심으론 노조가 잘 싸워서 많이 인상되길 바란다. 자신들 임금도 인상되는 까닭이다. 중심부 노조들의 높은 임금엔 숨은 조력자가 있는데, 다름 아닌 사측의 노사업무 담당들이다.

재계 담당들 반응 중에 재밌는 게 있었다. 그거 진짜로 추진하면 민주노총 완전 뜨겠는데요, 재계가 코너로 몰리지요, 라는 반응이었다. 몇몇은 내게 되레 물었다. “그러면 그거, 민주노총은 조합원들 설득 가능해요?” '뻥'이 될지언정 호기롭게 대답하려다 얼버무리고 말았다. 중심부 노동자들도 손해를 봐야 하는 구상이었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상당수가 중심부 노동자였다. 강하게 반발할 수 있다. 차기 선거를 생각하는 활동가들은 입을 닫거나 편승할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30년, 민주노조운동의 임금전략은 투쟁을 통한 상향평준화였다. 특정 기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해도, 노동자 임금을 동결하자는 주장은 이단이다. 감히 민주노조운동의 역린을 건드리는 구상이다. 강심장이 아니면 가벼운 자리에서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안팎에서 격론이 벌어질 수 있다. 개량주의자의 정규직 양보론이라는 비판이 따를 것이다. 노동자가 왜 동결하나, 자본에게 빼앗아야 한다, 세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 라고 반박할 것이다. 호기롭게 대답하지 못한 이유였다.

가슴에 불안의 응어리가 켜켜이 쌓이며 내 자신이 파괴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 술자리였다. 기아자동차지부 신승철이 말했다. 글 때문에 마음 상처 심할 텐데, 빨리 결론 쓰고 벗어나라. 깜짝 놀랐다. 민주노총 위원장 그냥 한 게 아니군. 내면을 읽는 벗을 둬서 기뻤다. 한때는 그놈의 정파 때문에 서로 사갈시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신승철은 한 가지 간과했다. 결론을 던지고 멈추려는 게 아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혁명 뒤의 세상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불평등이 조금이라도 해소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밀고 가야 한다. 노동자마저 금수저와 흙수저로 분단된 극단적 불평등의 사회를 제대로 뒤흔들려면, 노동운동이 제 살점을 도려내면서라도 뭔가를 던지고 앞장서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것을 재벌이 하겠는가. 정부가 하겠는가. 보수정치권이 하겠는가.

신승철 말에 비정규교수노조 임순광은 빙그레 웃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김태현은 놀랐다. 하는 짓이 평소와 똑같아 전혀 몰랐는데, 아팠냐? 꾹꾹 누르고 있는 속내를 털어놨다. 지금도 되게 아파요. 이 나이에 온갖 욕을 자청하며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란 놈을 이해 못하겠어요. 씩 웃고선, 술잔을 연거푸 털어 넣었다.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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